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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Jul 19. 2023

마흔다섯, 잔치는 끝났다

끝날 줄 알았다. 서른이 넘으면 잔치가 끝났다고 말하는 시를 이십 대에 읽으며 나도 서른이 넘으면 끝나는구나 했다. 서른이 넘어도 끝나는 건 간혹 들어오던 소개팅뿐이었다. 더 어른스러워지지도, 상처에 익숙해지지도, 불안에 태연해지지도 않았다. '그 시인은 서른에 끝났나 보군. 설마 소개팅이 끝났다는 건 아닐 거 아니야.' 하며 죄 없는 시인만 나무랐다.


마흔이 넘으니 밤을 꼴딱 새워서 놀 수 있던 체력이 끝났다. 어영부영 이어오던 무심하고 상처되는 인연들이 끝났다. 끝나버린 체력과 인연이 그립기도 하지만 오래 그리워할 시간도 끝났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되도록 손이 덜 가는 메뉴를 생각해서 저녁을 만든다. 5살 둘째를 씻기고 입히고 좀 놀아주다가 저녁을 차리고 치우면 오늘 내가 쓸 시간은 끝난다. 뭐가 이리 빨리도 끝나는지. 뭐가 이리 쉽게 끝나는지.


잔치 때 먹던 잡채가 먹고 싶지만 손이 많이 가고 일이 많아 잘 안 하게 된다. 남편이 잘 먹는다면 그 핑계를 대고 자주 하겠지만 어릴 때 잡채 먹고 급체해서 남편은 잡채를 멀리했다.(잡채 안 먹는 사람 결혼하고 처음 봤어요. 잡채를 안 먹는 사람이랑 제가 같이 살아요. 잡채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제가요) 그래도 오늘은 잡채를 먹고 싶다. 요즘 채소 너무 안 먹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해야 했다. 당면을 삶고 부추, 당근, 양파, 대파를 당면보다 많이 준비했다. 부산은 잡채에 어묵을 채 썰어 넣는다. 개인적으로 고기보다 어묵을 선호한다. 간장을 붓고 설탕으로 간을 하고 잔치집처럼 기름 냄새를 풍기며 잡채를 볶았다.

1시간 걸려서 잡채를 해서 아이들 밥 위에 덮밥처럼 올려줬다. 마흔 다섯 체력은 끝났다. 좀 많다 싶게 양푼 가득 하긴 했지만 이 정도 했다고 힘이 든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종아리가 붓는 기분이지만 잔치같이 맛있게 먹었다. 마흔다섯은 끝난 게 많다. 그러나 새로 얻은 게 더 많다. 늘어난 뱃살, 인간에 대한 예의, 인류애, 아이들, 남편, 그리고 스스로를 대견해할 줄 안다. 잡채를 먹으며 '좋은 엄마야, 이런 것도 해주고 말이야'하며 나를 칭찬했다. 몸에 좋은 채소 가득 넣어서 맛있게 잡채 해줘서 고맙다고 아무도 말해줬지만 괜찮다. 양푼 가득한 양이면 아이들 반찬으로 며칠은 먹을 수 있으니 내일은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이다. 잡채 안 좋아하는 남편은 라면 끓여 먹으라고 해야겠다. 마흔다섯, 잔치는 끝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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