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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Jun 22. 2023

물에 빠진 고기는 안 먹습니다

물에 빠진 고기는 안 먹습니다.
누가? 내가 그랬습니다.


결혼 전에는 그랬다. 설렁탕, 돼지국밥, 백숙을 먹자고 하면 그렇게 말했다.

"물에 빠진 고기 안 먹어요. 물에 빠진 건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다 안 먹어요." 했다. 그렇게 까탈을 부리지 않아도 나 좋다고 안 할 것 같은 소개팅남 한 명은 그랬다.

"설렁탕, 돼지국밥, 백숙을 안 먹다니... 인생의 큰 재미를 놓치고 사네요." 하며 안쓰럽게 나를 봤다. 밥은 다음에 먹자고 얼버무리며 애프터도 신청 안 했다. 너랑 물에 빠진 고기를 먹느니 집에서 가서 혼자 맥주 마시며 미드를 보겠다고 속으로 말하며 공식적으로 내가 찬 거라고 주선자에게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노라고.


물에 빠진 고기 안 먹고살았다. 불에 구운 고기가 좋았다. 소고기는 원래 별로 안 좋아하지만 숯불에 구운 값비싼 생고기는 조금 먹었다. 돼지고기는 양념도 잘 먹고 삼겹살은 아침 7시에 일어나서도 먹을 수 있었다. 아침에 고기를 어떻게 먹냐는 사람에게 그럼 삼겹살을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게 삼겹살 좋아했다. 기름에 튀긴 닭은 매일 먹어도 과연 질릴까 궁금했다. 33년을 내 입맛과 내 식성을 존중해 주고 존중받으며 살았다.

11살과 5살을 키우는 엄마는 고기를 주로 물에 빠트린다. 소고기는 국으로, 전골로 끓인다. 기운 없는 날은 돼지국밥을 시켜 밥을 말아먹는다. 아이들은 맑게 나는 다진 양념을 풀어서 빨갛게 먹는다. 여름이면 작은 닭을 한 마리 사서 백숙을 한다. 1시간쯤 닭을 끓인다. 한약재와 통마늘을 넣어서 끓이면 소금과 후추만 준비하면 된다. 닭이 끓는 동안 불려놓은 찹쌀로 죽을 만들면 다음 날 아침까지 아이들이 잘 먹는다.

물에 빠진 고기는 잘 먹습니다.

그렇게 까탈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 소개팅님과 잘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 남편과 결혼을 못하고 우리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물에 빠진 고기 안 먹어서 다행이었구나 싶다. 연애하면서 삼겹살 먹으러 자주 가던 남편은 돼지고기 체질에 안 맞아도 먹어줬다. 설렁탕 제일 좋아하면서 내가 안 먹는다니 먹으러 가자 소리 한 적이 없다. 치킨에 맥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닭고기 싫어하고 술도 안 먹으면서 잘 따라다녔다.

덕분에 이제 나도 물에 빠진 고기 잘 먹는다.

오늘은 좀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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