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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자적 Apr 08. 2019

사랑에 빠질 때면 시가 쓰고 싶어

오늘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닙니다

 오늘은 모처럼 애인의 동네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날. 괜찮은 카페가 있을 거란 생각이 좀체 들지 않는 허름한 골목길에 있단다. 별 기대 없이 카페에 들어섰는데 아니 이곳은 내 예상을 초월하고 내 편견을 씹어먹는 재야의 숨은 고수 같은 그런 곳이 아니겠는가! 애당초 모든 일에 큰 기대를 품지 않으면 안온히 살며 중간은 가겠다만 이 곳은 큰 기대를 했어도 좋았을 곳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안정적인 톤의 인테리어며, 가지런하게 정리된 소품이며, 주인장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각 의자에 놓인 전기방석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꽤 이른 시각이었고 약속 시간보다 40분 일찍 도착한 바람에 카페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이 아늑하고 어여쁜 카페의 바 테이블에 홀로 앉아 갓 내린 커피를 홀짝이자니 행복이 물씬 밀려왔다. 밖에서 밀려와 안에서 머금는 종류의 행복이었다.


 "소극적 투자보다는 공격적 투자! 한곳에 집중보다는 여러 곳에 분산! "이란 법칙은 주식뿐 아니라 카페에도 이렇게 적용된다. 떨리지만 이렇게 낯선 곳으로 용케도 찾아왔고, 그 덕분에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가령 스타벅스)"으로는 절대 못 얻을 수익(=만족)을 낚았다. 이 정도면 좋은 가치주 발견이라 할 수 있으려나.


 핸드폰을 열어 그에게 연락하니 삼십 분 내로 도착한다고 한다. 카페에 먼저 도착해 이곳으로 금방 올 그를 가만 기다리자니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때가 왕왕 생각난다. 그 시절 가득 부풀었던 감정도 함께 말이다.




 인간은 사랑에 빠지면 욕망도 커진다. 항상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지만,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이전과 이후가 명확히 갈린다. 건조한 일상을 살던 사람도 사랑에 빠지는 순간 각종 욕망들로 활력을 얻게 된다. 보고 싶은 욕망, 무언가를 함께 공유하고 싶은 욕망, 내 것을 나누어 주고 싶은 욕망, 나만 차지하고 싶은 욕망, 웃게 해주고 싶은 욕망, 만지고 싶은 욕망, 상대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 나로 인해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욕망.


 내가 사랑에 빠진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내게 가장 두드러졌던 욕망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었다. 누군가가 가슴에 들어와 계속 머무르기 때문에 난 그 어느 때보다 감성적이 되곤 했다. 그 감성은 그를 대상화한 온갖 상념들을 꾸준히 데려왔다. 그 넘치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기에는 글이 제격이었다. 이 몽글몽글한 느낌이 증발되지 않고 계속 기억될 수 있도록 일기를 쓰기도 했고, 이 찌릿찌릿한 감정을 편지지에 꾹꾹 눌러 담아 그 누구에게 아낌없이 전하기도 했다.


  시를 쓰는 어플 "씀"을 애용했던 적도 딱 그때였다. 당시 나의 한창 꽃피는 활자표현욕(?)과 맞물려 그곳에 많은 시를 써내려 가곤 했다. 글감은 하루하루 매번 달리 주어졌다. 하얀색, 벅차다, 묻는다면, 지속, 무작정, 친숙한, 솔직하게, 아주 먼, 물끄러미, 파괴 등과 같은 짧은 단어들이다. 완성된 시는 나만 간직할 수도 있고, 타인에게 공개할 수도 있으며, 나 역시 타인의 공개된 여러 시들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과정은 꽤 재밌었다. 보여줄 사람도, 평가할 사람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감 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이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 아니면 시집을 즐겨 읽는 사람이 본다면 단조롭기 짝이 없고 규칙도 없는 엉망진창의 시일 테지만, 주어진 글감에 내 감정이나 생각을 입혀 짤막한 글을 써내려 가는 것은 수필과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었다.




사랑하면 우린 생각이 많아진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지고, 전해주고 싶은 말도 덩달아 늘어난다.

그래서 사랑은 말이 많다. 그 많은 말로도 전부를 표현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마다 수줍게 써내려 갔던 시 몇 편을 공개한다.



#1 낮과 밤


너의 낮보다 밤을 먼저 손에 쥐었다.

어둠이 주는 묘한 해방감 속
쉽사리 가능했던 설렘은 아니었던지
밤에 갇혀버린 불안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밤은 어떠한 설명도 요하지 않는 터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대낮에 너를 다시 보았다

햇볕 아래 너는 더없이 선명했고

내 떨림도 더없이 분명했다


모든 건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2 충분한 대답


널 좋아하기 시작한 몇 가지 이유들이
언제부턴가 희미해졌다

너라는 사람을 억지로 수식에 구겨 넣어
사랑이라는 결괏값을 도출시킨 조건들,
이를테면, "착해서", "재밌어서" 등과 같은 이유들을
들춰내는 작업이 몹시도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새
있는 힘껏 팽창한 감정의 부피를 전할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일까

넌 그날도 내게 물었다
내가 왜 좋아?

네가 원하는 대답은 알지만
난 더 이상 그 대답을 해줄 수 없다

음, 그냥 왜 그런 거 있잖아
너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게 좋은 거


그냥 네가 마냥 좋아
네가 너인 이상 앞으로도 계속 좋을 거 같아

이토록 무책임하게 뭉뚱그린 말이
네게 충분한 대답으로 다가갔으면



#3 무심코


내가 무심코 뻗은 발에 넌 닿아 주었다
내가 무심코 잡아끈 손에 넌 잡혀 주었다

더 이상 네게 무심할 수 없어진 5월 어느 날 이후
넌 내 대부분이 되어 버렸다



#4 빠져들다


"빠져들다"란 것이 무엇인지
온몸의 감각으로 마주한 순간이었지, 아마
과거의 사랑인 줄로만 알았던 모든 기억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어



#5 오른손


예정된 결말을 향해
아니 예정되어 있다고 믿고 싶은 결말을 향해
함께 걷는다

왼손엔 약간의 불안감을 쥐고
오른손엔 약간보다 약간 큰 기대감을 쥐고
 
내 오른손에 포개진 네 손이 참 따뜻하다


내 왼손은 이토록 시린데
이미 따뜻해진 오른손이 널 놔줄 수 없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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