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이요"
고개 숙이고 있던 내 앞에 귤이 불쑥.
"오늘 급식으로 나왔어요"
"너 먹지"
자기는 먹었다며 하나를 더 들고 왔다고 했다.
귤을 내미는 손은 따뜻했고
귤을 받아 든 나는 따뜻해졌다.
손내민 아이는 책도 빌리지 않고
뒤돌아 밖으로 걸어갔다.
도서관으로 와 다시 교실로 올라가기 귀찮았을 텐데
귤 하나를 주러 일부러 온 거였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 봤다.
귤처럼 동글동글한 머리가 귀여웠다.
주머니에 귤 하나를 집어넣고
여기까지 온 걸음이 고마웠다.
귤 하나에 감동했나? 참 시시한 나.
겨울이면 흔하고 흔해 식탁 위에 굴러다니는
귤 하나에 좋아하다니.
귤을 까지도 않았는데 벌써 귤 향이 나는 듯했다.
손에 쥔 귤을 동글동글 굴리고 조물조물 만졌다.
적당히 말랑해졌을 때 콕 찔러 껍질을 살짝 벗겼다.
토독, 토독 건조한 공기 속으로
상큼하게 퍼지는 노란 귤향.
노란 개나리만큼 화사했다.
바싹 마른 겨울 공기가 금세 명랑했다.
톡 톡 열리는 귤껍질만큼 내 기분도 발랄해졌다.
평생 귤을 처음 먹는 사람처럼 한 개 한 개 아껴먹었다.
살살 깨물고 오래오래 굴리며 천천히 먹었다.
레몬의 새콤함과 오렌지의 달콤함이 적당히 섞여 새콤달콤하니 맛났다.
주머니에서 나온 귤은 따뜻했다.
주머니 속 온기도 가져와 더 따뜻한 거겠지.
그래서 더 달았다.
콧노래가 조금 나왔고 머리도 까딱 까닥 움직였다.
오물오물 먹으면서 나는 달달한 귤이 되었다.
옆에서 쿡쿡 찔러대도 그저 웃고만 있을 만큼
달달한 나.
귤은 금세 다 먹었고 껍질은 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귤 향이 났다.
귤을 까던 손끝이 향긋했다.
언제 묻었는지 노란 귤 향이 손에 베여있었다.
귤은 없어도 귤향이 오래오래 남았다.
연하고 무른 귤이라 얕잡아 봤건만
자신의 흔적은 야물게도 남겼다.
귤향을 공기에 퍼뜨리고 입속에도 터뜨리더니
손끝마저도 물들였다.
귤은 동글납작한 것이 만만해 보이고 노란빛은 편하다.
껍질마저 연해 홀랑홀랑 제 속을 잘도 내어준다.
이렇게나 무른 녀석이
남에게 쉽게 자기 향을 옮기고
이내 물들게 하는 굳센 놈이었다.
세상엔 단단하고 강한,
꼿꼿하고 억센 사람이 많다.
내 맘을 알아달라
내 편이 되어달라
그런데 귤이란 녀석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언제 물들었나도 모르게 귤빛이 베개 한다.
얼마나 지혜로운지.
꼭 강하다고 강한 게 아니고 연하다고 연하게 아니다.
'귤 같은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은하게 자국을 남기는 사람 말이다.
부담 없이 곁에 와선
같이 있는 동안 달달하고
가고 나선 여훈이 남는
그런 귤 같은 사람.
귤 하나면 내 마음도 쉬이 줄 수 있다.
주머니 속에 잘 들어가고
쉽게 뭉개지지 않고
한 손에 쏙 들어가 건네기도 좋고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은 귤.
이 사랑스러운 귤을 어쩔까.
딱히 줄 사람이 없으면서
나는 주머니에 귤 하나를 넣어 다닌다.
그런데 줄 사람은 늘 생겼다.
귤 내미는 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고
받고선 다들 미소를 지었다.
나는 겨울이 좋다.
주머니 속 온기를 나눠 줄 귤이 있어 좋고,
닮고 싶은 귤이 주렁주렁 열려서 좋다.
귤이 있는 이 계절.
겨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