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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교 Sep 28. 2021

선명해지니까

가만히 들여다본 것

선명해지니까

희교


육상 선수들의 실력은 다리의 근육이 말해 준다. 높이뛰기에서 바에 가까워지는 선수의 허벅지가 카메라에 잡히면 불룩해졌다가 힘이 빠지는 근육이 또렷하게 보인다.  

마음의 근육도 가까이 들이대는 사건이 없으면 결이 자세히 보이지 않을 거다.


사람이 사랑을 다루는 능력을 마음의 근육이 맡는다고 한다면 가장 가까이 머무는 사람에게는 투명하게 그대로 다 보여주겠지. 무엇을? 마음의 결을 말이다. 토라지고 흥분하고 열내고 열 받는 지점이 어디인지 극명하게 드러내게 되니까 말이다.


작년에 온라인 글쓰기를 함께했던 지방에 사는 한 사람은 프로그램을 열어 주는 서울의 어느 독립책방에 찾아갔다가 찬밥 신세임을 알고 돌아와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물론 다른 이유들이 있겠지만 여름 더운 날 혼자 찾아갔던 길이 뭐랄까 보답도 소득도 없었다고 생각했던 듯했다.


글을 쓰고 싶은 직장인이나 주부,  이미 작가인 참가자들이 프로그램을 가이드해 주는 기성 작가가 제시하는 주제에 따라 주 간 글을 쓰고 서로 읽고 호응해 주며 글 동무가 된다.


마냥 처음 쓰는 초짜만 있지도 않고 본격적인 글쓰기는 처음이라 해도 글이 찰지고 야무진 철학을 내뿜는 이도 있었다. 사실 나도 그 책방이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지 않는다면 이 프로그램에 장기 참여한 초보 글쓴이들의 글을 모아 소셜펀딩을 통해서라도 한 권 내주지 않겠나 내심 기대했다. 참가자들이 서로를 응원하며 글을 쓰는 동안 글도 내면도 살져 간다면 그런 글을 모은 책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도 있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 글쓰기 친구가 받은 냉대는 내게도 상처였으니 그 친구에게는 적잖이 쓰라렸으리라 짐작한다. 거기다가 그 독립책방은 기수별로 가이드 해 준 기성 작가들의 글을 모아 텀블벅을 통해 책을 내기까지 했다. 글쓰기 친구가 전해 준 차가운 책방행 이야기는 밀쳐두고서라도 나는 가이드 해 준 작가들의 책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 책방 에스엔에스를 언팔로우했다.


살아 주어 고마워 종이에 수채 2021 lydia


내가 전시회를 대녀네 카페에서 하기로 정했다는 소식을 올린 후 벌어진 상황은 모호하긴 하지만 찜찜한 건 분명했다. 꾸준히 소통하던 내가 사는 동네 가까이 한 카페와 독립책방이 대녀네 카페를 소개하기 시작한 내 피드를 모른 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카페에 가서도 실내 이쁜 초록이를 그려 드렸고 태그도 달았더랬으며 차도 테이크아웃으로 몇 번 사먹은 바 있었고 독립책방은 프로그램도 신청해 안면을 텄다면 튼 사이였단 말이다. 확인할 수 없는 나만의 느낌일 수 있다 물론. 내가 순진해서일 거지만 마음은 잠깐이긴 해도 편하지 않았다.


큰 수술이 아니어도 수술 날을 잡으며 미루려던 전시회를 계속 진행하게 되면서 통증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그림을 고르고 필요한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주문하며 챙기는 일을 하자니 충분히 버거웠다.


아픔을 견디며 준비하는 와중에 그 이전부터 준비하다 수술 후로 미뤄 둔 책방 수업까지 신경쓰기란 너무도 큰 일이었다. 하여 몇 가지 한 번 더 봐달라는 주문에 솔직하게 말했다. 전시회를 하게 되었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여력이 없다고 알렸더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수술한 뒤 마음을 편하게 가졌어야 하는데 이 일로 신경쓰게 되어 그때부터 수술한 상처가 덧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3주 정도 잡던 새살 나고 아무는 기간이 석달 반이 지나도록 덧나고 덧났다.  


글쓰기 프로그램 동료가 전해 주던 말에는 서울의 책방 주인이 자신이 방문했다고 동료직원이 큰소리로 서너 번이나 알려 주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하더라는 상황이 있었다. 말만 들어도 씁쓸한 일을 치 내가 당한 듯했다. 적어도 우리는 같은 글쓰기 프로그램을 3번 넘게 등록한 고객이었고 순수하게 서로에게 고마울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마 우리 생각일 뿐이었던가 보다.


나도 동네책방에서 작년 내내 프로그램을 들었고 많지 않아도 책도 구입한 손님이다. 순수하게 내 전시회에 축하한다는 한 마디도 못 들어야 하는 걸까 생각이 들어 많이 씁쓸했다.


내 마음의 근육 얘기로 다시 돌아와 보자. 내 마음의 근육은 어느 지점에서 민감하게 접히냐면 내가 수단으로 이용되는구나 감지될 때다.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 받고 싶지 내가 그 책방이나 카페에 돈을 벌어 줄 수 있으면 상대하고 아니면 고개 돌리는 주인장들하고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상대하고 싶지 않다.


관계 정리를 재작년에 아프면서도 했지만 원래도 정리를 잘 하며 살았다. 관계 정리를 하며 살아도 되는 줄 알았더라면 마음이 가벼웠을 텐데 그때는 좀 무겁게 받아들였었다. 좀더 참아 볼 건데 그랬나 싶어서.


글쓰기 프로그램의 어느 날 주제가 '너에게 그땐 말 못 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와 비슷한 문구였던 날이 있다. 그때 몇 년 전 초심자인 내게 책임과 의무 막중한 버거운 일을 맡겨 놓고선 자기의 충고를 안 듣는다고 지청구를 해대며 나를 흔들고는 급기야 일 잘못했다고 손가락질 해대더니 결국 나를 자기네 무리에서 따돌린다고 전해 주던 한 사람에 대해 썼다. 따돌리는 잘못을 저지른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며 너희들이 나를 따돌린다고 해서 최선을 다한 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그 문장을 쓰고서 나는 관계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써놓고 보니 문제가 선명해져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딱 보였다. 나는 지금도 이 글을 쓰고 관계 정리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선명해지니까.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중에서 2021 종이에 펜 Ly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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