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를 기다린다

by 진이령

로즈마리와 레몬 그리고 계피의 진한 향이 어우러진 그곳에서 그녀와 마주했다. 향에 도취된 것일까. 나는 살풋 어지럼을 느꼈다. 그녀만큼 아름다운 향기에 감각이 날카로이 섰다.

드러머는 얇고 가는 채로 심벌즈를 두드린다. 소리가 공명할 때마다 동공이 커지고, 숨 가쁘게 박자가 치고 올라감에 따라 들숨 날숨이 빨라지고, 높아지는 음정에 따라 내 심장 박동도 빨라진다.

모든 것은 마법과 같은 분위기 때문이라.
모든 것은 감미로운 음악이 선사하는 분위기 때문이라.
모든 것은 감각적인 향내의 속삭임 때문이라.

나는 애써 부정해보지만 이내 납득당한다.

모든 것은 그녀가 내뿜는 마법 같은 분위기 때문이라.
모든 것은 그녀가 선사하는 감미로운 목소리 때문이라.
모든 것은 그녀가 풍기는 감각적인 향내의 속삭임 때문이라.

사실 이 모든 감정의 시작은 그녀의 은밀하고도 진솔한 이야기 때문이라.

나는 그러나 비겁하게 숨는다.
그녀의 눈을 마주하지도, 그녀의 목소리에 설득당하지도 않으려 애를 쓴다.
나는 안다. 그녀가 나를 범하리라는 것을.
그녀 앞의 나는 이미 나신이 되어 홑겹 한 자락도 걸치지 못했음를 안다.
부끄러움과 설렘과 그리고 두려움. 두려움은 나를 잡아먹는다. 욕망의 불길이 지나간 자리보다 더 까만... 두려움...

나는 나를 내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를 샅샅이 훑어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쾌감과 동시에 죄의식을 느꼈다.
존재의 죄의식. 나란 존재가 가지는, 아담에서 부터 시작된 원죄.
나는 끝없이 나 자신을 의식하고 의심한다. 원죄는 끝없이 이어져 나에게 도달했고 이젠 그녀에게로 향한다. 나는 이 원죄의 고리를 끊고 싶다. 그렇기에 그녀를 밀어낸다.

다시 돌아가서, 나를 뒤집어놓은 쾌감. 그 쾌감을 이야기해본다. 나 자신이 된다는 건 두렵지만 한편으론 긴장감 있는 펜싱 경기를 하는 것과도 같다. 찌르고 빠지고 잠시 숨 고를 틈도 없이 또다시 빈틈을 찌른다. 찌르고 찔림에서 오는 쾌감. 나는 자꾸만 더 그녀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나는 적수가 되지 않았다. 나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때론 피 흘리며 얌전히 굴종의 시간을 보낸다. 그녀를 거부하나 거절할 수는 없다. 나는 오늘도 피멍 든 상처를 핥으며 그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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