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를 사는 행운을 누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짧은 생의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떤 아티스트의 팬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동시대를 사는 행운을 누려 콘서트장에서 만나기도, 발매된 작품 소식을 듣기도, 매체를 통해 인터뷰를 접하기도 한다. 그는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일방향의 마음을 오랜 시간 갖는다. 이 팬심에는 존경과 사랑이 섞여있기도, 애정과 지지가 섞여있기도, 걱정과 우려가 섞여있기도 하다. 사카모토 류이치를 만난 어느 날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오늘. 그가 세상을 떠났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심상을 전해주는 아티스트였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든 안 오든,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들으면 언제든 하얗게 눈 내리는 고요한 설원의 풍경을 만날 수 있었고, <Rain>을 들으면 빗속을 뚫고 누군가를 애타게 만나러 뛰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Koko>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배 위로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며 토닥여주시던, 잠들기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모두 작곡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려온 자의적 심상이다.
오랜 시간 암 투병을 하다 영원한 안식의 길로 떠난 사카모토 류이치. 그를 애도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되짚어보려고 한다. 2018년 데뷔 40주년을 맞아 서울 회현동 피크닉에서 열렸던 <류이치 사카모토 특별전 : LIFE, LIFE>와, 같은 해 국내 개봉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그의 음악인생에서 영화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그가 만든 첫 OST(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이며, <Rain>은 그에게 오스카상을 안겨다준 영화 ‘마지막 황제 (1987)’의 OST다. 이후 삽십여 편이 훌쩍 넘는 영화의 음악 작업을 꾸준히 하였으며, 최근작으로는 영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2015)’, 국내 영화 중 ‘남한산성 (2017)’,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8)’, ‘애프터양 (2022)’의 음악 작업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픈 와중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미개봉 영화 ‘괴물 (Monster, 2023년 개봉 예정)’의 OST에 참여해, 이 작품이 유작이 될 예정이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오스카상과 그래미상을 받게 되었던 작품, <마지막 황제>의 OST다.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툴루치 감독의 영화로 아카데미에서만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 등 9개 부문을 휩쓸었다.
중국 청나라의 격변하는 시대상 속 마지막 황제 부의(푸이)의 위태로운 삶을 사카모토 류이치의 시선으로 그려낸 곡이다. 부의는 세 살의 나이에 청나라 황제의 자리에 올라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으로 시작해 혁명과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채 스러져간 인물이다. ‘Rain’은 영화에서 부의가 가장 처연한 장면에 쓰였다. 문수(부의의 부인)가 부의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자금성을 떠나는 장면이다. 빗속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문수와, 철저히 혼자가 되어버린 부의의 격정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시대적 상황을 통해 바라본 인물들의 감정선이 ‘절제된 격정’으로 표현되어 오히려 애처롭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본래 전자음악 버전으로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에 실렸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출발이었던 그룹 ‘YMO’는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줄임말로, 1978년에 결성된 일본의 전자음악 그룹이었다. YMO는 일본 팝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며 큰 인기를 끌었지만 사카모토 류이치는 1983년 그룹에서 탈퇴했다. 이후 첫 행보가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작품이니 전자음악으로 발매된 흐름이 자연스럽다. YMO에서 하던 전자음악이 영화로 이어지기 시작한 분기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카모토가 속해있던 YMO의 명반은 1집 [Yellow Magic Orchestra (1978)]과 2집 [Solid State Survivor (1979)]로 손꼽히는데, 전자음악 역사에 빠지지 않고 회자될 정도다. YMO의 2집 [Solid State Survivor]에 수록된 ‘Behind the Mask (1979)’는 마이클 잭슨과 에릭 클랩튼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Technopolis’는 테크노가 탄생되기 이전에 ‘Techno’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테크노를 발명한 후안 앳킨스에게 영감을 줬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훗날 테크노와 대척점에 있는 ‘앰비언트’ 장르의 전자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한다. 테크노가 신디사이저 음을 이용해 만든 빠른 템포의 댄스 음악으로 디지털에 가깝다면, 앰비언트 음악은 우리 주변의 소음까지도 활용해 자연에 존재하는 최소한의 음을 이용해 만든 명상적인 음악으로 아날로그에 가깝다. 최근작으로 영화 <애프터양> (2022)의 OST ‘Memory Bank’가 있다. ‘Memory Bank’는 휴머노이드(로봇 인간)인 주인공 ‘양’의 고장으로 가족들이 고치려고 시도하나 실패하자 메모리카드를 돌려보며 추모하는 씬에서 등장한다.
앰비언트 음악과 관련해 사카모토 류이치는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에서 필드 레코딩 방식을 보여준다. 자신이 직접 녹음한 세상의 소리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며 음악적 요소(악기)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비가 오는 날, 파란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수음을 하는 장면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얼마나 음악에 진심이었는지 보여준다.
2017년, 8년 만에 발매한 솔로앨범 [Async]는 앰비언트 장르를 구현한 손꼽히는 명반이며, 그가 병상에서도 끝까지 스케치하며 제작한 그의 마지막 정규앨범 [12] (2023.1 발매)는 비움과 공명의 정점을 보여준다. [Async] 앨범의 전곡을 듣는다면 ‘환경음악’이라고도 불리는 앰비언트 음악에 걸맞게, 숲의 흙과 비, 지구와 우주를 느낄 수 있다. 한 곡을 꼽는다면 [Async] 앨범의 첫 곡 ‘Andata’를 추천한다.
그는 죽음의 앞에서도 음악을 놓지 않았다. 영화음악에서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최근까지 작업을 (영화 ‘괴물’), 전자음악에서도 앰비언트 장르의 음반 발매를 (앨범 ‘12’), 마지막 콘서트로 작년 12월 ‘Ryuichi sakamoto : Playing the Piano 2022’를 개최하며 끝까지 음악으로 세상에 메시지를 던졌다. 음악을 하려면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며, 사회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온 그의 행보까지. 다시 한 번 동시대를 살며 위인을 볼 수 있어 경이로웠다고, 고마웠다고, 행복했다고 그를 향한 기도에 담아 말해본다.
음악평론가 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