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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Oct 06. 2022

성찰 Vs. 만족

멀쩡히 매달려있던 귀걸이 한쪽이 없어졌다. 똑딱단추 식으로 되어있고 뺄 때도 힘을 주어 빼어야 할 정도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귀걸이기에 사라진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근에 힘을 준 적도 없고 귀 쪽을 건드린 기억도 없어서 망연자실하다.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동선을 살피며 온갖 곳을 다 뒤져도 귀걸이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 한 복판을 뒹구는 신발 한 짝을 보곤 한다. 낡고 닳은 신발은 주인의 삶의 자취를 그대로 품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 신발을 한참이나 가슴에서 지워내지 못하곤 했다. 상실이라는 단어가 지닌 느낌을 온몸으로 느낀다.


누구나의 삶에도 깊이 새겨진 상실이 있다. 허망함, 스산함, 쓸쓸함, 슬픔, 괴로움 혹은 무력감으로 이어지는.

그을린 사랑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유언장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어떤 기억은 목 속에 꽂힌 칼과 같아서'

 뺄 수도 없고 그대로 놔두기에도 고통스러운, 그러나 잊고 산다고 하기에는 한 번씩 건드려지는 기억. 많은 경우, 그것을 직면하여 해결하는 수술을 하기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치환하는 망각의 효과를 선택한다. 너무 큰 대수술이 필요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성찰 Vs. 만족

[ 성찰(省察):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거나 살핌]

[만족(滿足): 마음에 흡족함.]


사소한 일부터 대수술이 필요한 일까지 되돌아보거나 살피는 것이 힘에 부쳐 다른 방법으로 치환한다. 숨통이 트일 것 같은 상황을 만들어 적당히 마음이 흡족한 상태로 살아간다. 성찰이 버거워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주관적 행복관으로 보자면 괜찮은 방법일 수 있다. '어차피 인생 뭐 있어. 즐겁게 가볍게 행복하게 살겠다.'

이 방법은 참 유익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혹 깊은 뿌리를 들여다보고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 있는데,  문제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발생시킬 때가 특히 그렇다고 본다. 나는 나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면 되지만, 내가 잃어버린 신발로 인해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면, 그 상대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대상이라면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힘들어도 성찰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자녀 문제로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다. 수년간 자녀는 심리상담을 받아왔지만 나아지는 게 없어 보인다고 한다.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녀의 학습에 관련된 고민을 이야기한다. 이 수업이 크게 효과가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냥 몸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수업이 효과가 없는 것은 아이가 수업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침묵하는 것이다.

심리 상담하는 곳은 왜 개선이 더딘지에 대해 무어라 얘기하는지를 물었다. 대답은 '부모가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아 개선되지 않는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심리상담실에는 일주일에 1번 방문한다. 대부분의 시간 아이와 많이 그리고 깊게 접촉하는 대상은 가족이다. 그렇다면 심리상담 보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변화라는 것은 너무나도 지당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수년간 상담비를 써가면서도 부모는 변화하지 않았다. 더 힘이 있는 어른도 변화를 시도하지 못하면서 아직 어린아이에게 변화하라는 것은, 수영을 배우지 못한 아이를 한강에 빠뜨리고 헤엄쳐 나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 지갑을 여는 것이라면 그만큼 간단하고 쉬운 것이 어디 있으랴. 사랑은 지갑을 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주어야 하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은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부모가 자녀에게 마음을 내어주려 하지 않겠는가.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없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없다기보다는 대수술의 과정을 거쳐, 문제 부위를 해부하고 들여다보고 살펴야 하는 성찰의 단계로 진입이 어려운 것이다.

친구 한 명은 마라톤을 한다. 중독성이 있다고 말한다. 더 단단해진 자신을 느낄 때 오는 성취감, 희열, 만족감은 힘들어도 또 뛰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라톤을 하다 보면 도저히 뛸 수 없을 것 같은, 더 뛰면 죽을 것만 같은 임계점이 찾아온다고 한다. 정말이지 죽을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그 지점을 넘어서면 괜찮아져서 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훈련할수록 그 임계점은 점점 늦춰진다고 한다. 할 수 있다고 같이 해보자고 마라톤을 권하지만, 나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1분도 뛰기 힘든 몸으로 언감생심 마라톤이라니.

자녀의 문제를 직면하고도 성찰과 변화를 외면하고 적당한 망각과 만족에 머무르려 하는 내 친구도 나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 부모가 그런 성격과 성향을 형성하기까지 잃어버린 신발의 시간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전쟁 같더라도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상실은 이미 과거 시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듯 모든 과거가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는 그 시간에 나를 가두게 되기도 한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나를 운전하는 것은 과거 그 시점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의도적인 망각으로 넘겨버릴 때 진정한 만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성찰을 환영하는 자세를 가져볼 필요가 있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잃어버린 발에 새 신발을 신겨주고 절룩거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 줄 요약: 상실은 힘든 경험이지만, 성찰의 시간으로 회복이 시작된다. 잃어버린 신발을 피하지 말고 빈 발을 직면하면, 어느 순간 새 신발이 신겨진 발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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