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거두어가는 가을비가 지나니 싸늘함이 피부를 파고든다. 하늘도 기지개를 켜듯 높고 푸르름이 한창이다. 들판은 노랗게 익어가고, 단풍은 울긋불긋 파란 하늘과 대비를 이루니, 수채화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가을이다.
눈으로 뵈는 아름다움과 대조적으로 이 맘 때 쯤이면 기온만큼이나 가슴 한 켠이 시리다.
'겨울로 들어서기 직전, 겨울을 앞두고 있는'
이 문장은 선이를 닮아있는 것 같다. 선이는 가을의 기온처럼 살아온 것 같다. 꽁꽁 얼어버리지는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며 가을을 살아오고 있었다. 선이의 마음과 닮은 이 시기의 기온을 느낄라치면 그안에 숨어있던 섭씨15도의 마음들이 하나둘 일어난다.
형태가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무형의 바람으로 불고 있을 뿐이다.
한여름 온동네가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선이는 그날 달빛만이 비치는 칠흑같은 어둠을 처음 목도했다. 모든 형상이 사라지고 소리만이 남아있던 밤처럼, 선이의 기억도 형상은 사라지고 소리만이 남아 울리고 있다. 눈을 감으면 간혹 형상이 나타나려 하지만 그만 뒤섞여 기하학 잔영만을 남기곤 한다. 과거로부터 무던히 떠나려했던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비워진 자리를 채울 무언가는 아직은 발견하지 못 했다.
슬픔이 드라마틱한 전개를 갖는 것만은 아니다. 밥먹고 숨을 쉬고 잠을 자듯 몸에 젖어버리는 슬픔도 있는 것이다. 때묻고 낡고 찢어진 옷을 입고 구멍난 신발에 구멍난 양말을 신은 씻지도 못한 우리 엄마를 같은 반 친구들이 보고 지나갈 때 느끼던 느낌들, 크리스마스날 해질녘 가게를 비치던 가난한 30촉짜리 백열등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
선이의 마음은 서늘한 불빛의 외로운 백열등이 섭씨15도로 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