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과의 점심
글이란 건 귀찮아서 잘 남기지 않는 나인데 오늘은 꼭 글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퇴사를 3일 앞두고 있는 나에게 2주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대표님과의 점심식사가 있던 날이다. 11시 40분쯤 대표님이 나를 데리러 상공회의소 앞에 와 계셨다. 새로 뽑은 차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 멘토와 멘티 사이일 때 차를 샀다고 했다. 그때 그 차를 끌고 와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차를 탔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지냈는지, 최근 얼굴을 잘 못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식사 장소로 향했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운동은 계속 다니냐는 이야기도 묻고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 장소에 도착했다.
점심식사 장소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라고 한다. 옥중 본이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각 자의 식사를 시키는데 웨이터님이 나오는데 오래 걸리는 것들만 시키셨네요.라는 말을 했다.
평소라면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에 대한 엄청난 불만을 가졌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이야기할 것이 많진 않지만 이야기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던 터라 아무렇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퇴사하는지 알렸는지 궁금해했다. 당연 알리지 않았다. 엄마는 갱년기에 굉장히 예민하고 우울한 시기인데 내 퇴사 이야기까지 하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서 안 알렸고 두 번째 이유는 끝없는 잔소리에 시달리지 않고 싶어서였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참 독립적이라고 했다. 이 직장에 들어와서 바뀐 내 환경 중에 하나다. 독립. 23년을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여기서 일을 하며 따로 살기 시작했고 부모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대표님이 말하길 이렇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지만 실은 민망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퇴사하기까지의 이유가 담겨있는 말이다. 이 글이 기고되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읽게 될 수 있는 글이기에 따로 퇴사를 왜 하게 되었는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이렇게 신경 써보고 생각을 많이 한 것이 처음이라 방법이 틀렸다고 이야기했다. 너무 과했다라며 인정했다. 너에게 부담을 줬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꿔바로우, 잡채밥, 철판볶음밥이었다. 오래된 식당 이랬는데 리모델링을 했는지 참 고급스러웠고 식당 이용 연령층이 굉장히 높았다. 이 곳이 오래된 맛집이며 현지인이 맛집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모습이다.
이야기를 하다 지난주 매니저들끼리 만나 내가 퇴사한다고 전하는 자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매니저들이 놀라지 않는지, 붙잡는 매니저는 없었냐고 물었다. 놀라워했고 붙잡는 매니저는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다들 나보고 어딜 가도 잘 해낼 거라고 말했다. 그곳의 절반은 내가 왜 회사를 그만두는지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다가 후배 매니저 00이(가)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 이야기를 두 번째 듣는데 그 매니저는 한 번 말한 이야기를 몇 명이 같이 듣고선 한 명 한 명에게 여러 번 듣다 보니 다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어렵고 무서웠나 싶기도 하면서도 한 번 말한 것을 내가 여러 번 들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자리에서는 그리 큰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대화는 근처 커피숍에서 했다. 그곳도 전주에서 굉장히 오래된 커피숍이라고 했다. 오늘의 콘셉트는 오래된 곳인가 보다.
음료를 시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부담스러웠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모든 상황이나 감정을 부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꾸준히 내비쳤던 이야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만 좋은 거 아니고 너도 좋았으니깐 너무 부정하지 말아라.라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이미 부담스럽고 그런 순간들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한들 좋게 들릴 리 만무하다. 대표님만 이런저런 주저리주저리 하고 있으니 나에게 할 말이 없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오늘 대표님과 점심이 약속되어 있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보긴 했다. 그런데 딱히 나누고 싶은 대화의 주제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대로 말했다. 그랬더니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나누고 싶은 대화가 없다니,, 하며 한 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너의 성향상, 나의 성향상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면 뒤도 안 돌아보고 본 적 없는 남인 듯 지낼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관계라는 것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 관계들이 있고 평생을 함께 하는 친구 같은 관계가 있고 비즈니스로 지내는 관계가 있는데 스쳐 지나갈 것 같아서 걱정이란다.
아무런 말 안 했다. 현재 내 마음은 그렇게 지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흐르면 나도 이 곳에서 겪었던 일이 무뎌지고 좋았던 순간들이 떠오르게 된다면 관계를 평범하게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지금은 전혀 그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그곳에서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대화는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면 지금부터 말할 대화 때문이다.
나는 오늘 너를 붙잡기 위해 나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퇴로를 모두 막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첫째, 8월 한 달간 유급휴가로 쉬면서 퇴사를 다시 생각해보고 후에 퇴사에 대해 이야기하면 좋겠다.
둘째, 21년 시작과 동시에 승진, 연봉 인상 보장하겠다.
셋째, 위 두 가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와라.
다소 놀라긴 했다. 대표님과의 점심을 먹으러 나간 것은 이 곳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젠 털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는데 다시 해보자니,,
그 제안을 듣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왜 저런 조건을 걸어가면서까지 나를 붙잡으려 하는지였다. 그래서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냥 너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 많은 사람을 봐왔고 많은 사람을 본 만큼 이별도 많이 겪었다. 다른 사람들이 떠날 때 아무 미련 없이 보내준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 네가 숨겨진 진주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실제 너와 함께 일을 하면서 그 생각은 확신이 들었고 다른 매니저들에 비해 세 가지 사업 분야 모두를 다룰 수 있고 잘 해내는 모습을 봐왔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내 입에서 나온 첫 말은 언제까지 대답드려야 해요? 였다.
별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별로인 대답이다. 별로인 정도가 아니라 저러면 안 됐다. 언제까지 대답해야 하냐니, 여지를 준 답이다.
나는 이 곳을 떠나기 위해 5월부터 마음고생하며 퇴사를 말했고 말했고 말했다. 그런데 연봉과 유급휴가에 흔들리다니,,, 다소 나에게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매니저에서 부팀장이 된다면 받게 될 월급, 한 달간 생각해본다고 하면서 월급을 더 받을까? 하는 생각 등등 속으로 계산하게 됐다.
내가 겪었던 고통, 심리적 불안 등등 이제 좀 회복됐는데 그 속에 다시 들어갈까 라는 생각을 2분 동안이나 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렇게도 내가 물질적인 것에 약한가? 내 눈 앞에 있는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겪은 모든 마음을 다시 헤아려 정신 차리고 모두 다 됐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떠나야만 한다.
내가 됐다고 하니 대표님의 표정이 다양해졌다. 일그러지는 듯하면서 절제하려 했고 괜찮은 듯 보이려 했다.
그 이후의 대화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꽤나 인상적인 대화였나 보다 저 세 가지를 쓰려고 이 글을 쓰고 있으니.
그 이야기를 하고 나니 여러 생각이 들고 복잡 미묘하고 퇴사하기 전에 팀원들과의 관계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어떻게 잘 매듭지어야 할지도 생각하다 보니 사무실로 돌아와서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다.
어찌어찌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하고 와서 샤워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서 허투루 일하진 않았나 보다, 이 곳에서 필요로 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런 제안을 받아서 내심 기분이 좋나 보다. 아니 좋은 것 같다.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해 줄 테니 남아서 일해달라니, 2년 1개월 동안 일했던 것을 보상받는 말인 듯싶었다.
한편으로는 지난달에 그만둔 한 부팀장님이 떠올랐다. 그분은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두긴 했지만 퇴사한다고 했을 때 대표님과의 점심을 따로 하지도 않았으며 유급휴가를 주겠다고는 했지만 처우를 개선하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내가 대표님에게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인가?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게 됐다. 진짜 쓸데없다.
나는 부팀장이 된다면 받는 연봉을 알고 있었다. 처우가 어떻게 달라질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의 삶을 크게 바꿀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2분 만에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눈 앞에 억대의 뇌물을 가져다주며 자신의 잘못을 눈감아주거나 잘 좀 봐달라는 뇌물을 받는 정치인들의 마음이 왜 갑자기 공감되는 것인지,, 물질적인 것이 자신의 판단력을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무기구나 라는 것을 책이나 TV에서 그럴 수 있겠구나가 아닌 직접 느낀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꼭 견뎌야 할 단계. 이별.
3일 남은 퇴사. 잘 매듭짓자.
ps. 그냥 갑자기 든 생각인데 시작하는 단계의 자리이거나 마무리하는 단계이거나 싸우는 자리면 무조건 예쁘고 빛나게 하고 가자. 외모도 무기. 꼭 예뻐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장점이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