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수학이 좋아 이과를 갔지만 엉뚱하게도 대학교에서 과학 과목인 해양 환경을 전공했다. 전공수업을 들으며 방황했다. 바닷속 세상은 궁금하지도 않은데 해양 물리, 해양생물 등 바다를 파헤치는 학문에 좀처럼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졸업하면 뭘 해야 하나 막연히 생각만 하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잡지 한 권을 봤다. 그 잡지에는 매 호 다양한 직업을 소개하는 챕터가 있었다. 거기에는 출판 편집자라는 직업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그 글을 보고 스물한 살 때 장래희망이 출판 편집자로 바뀌었다. 사실 바뀐 건 아니다. 애초에 꿈이 명확하게 있지 않았으니까.
부산에는 출판 일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3학년 2학기가 끝난 후 휴학을 했다.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고 모은 돈을 가지고 서울로 갔다. 지금은 서울이나 부산, 그 외 다른 곳도 문화적인 차이가 크지 않지만 12년 전만 해도 지방에서는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가 너무 적었다. 당연히 강의에서도 양질의 차이가 심했다. 국영수 등 수능 교과 외에 다른 컨텐츠의 강의는 온라인으로도 접하기 힘들었다.
연고 하나 없는 서울 신촌의 고시텔에 살며 출판 편집자 수업을 듣고, 교정교열 수업, 문학 분석 수업 등 출판과 관련될 법한 몇 개의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들을 때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울말을 쓰며 어려운 수업을 이해하고 과제를 척척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우면서 동시에 잘하고 싶은 욕구도 샘솟았다. (문득 그때 교정교열 수업을 해주시던 선생님 연세가 82세였는데, 12년이 지난 지금 건강히 계실까 궁금하다. 아직도 어디선가 수업을 하실 것만 같다. 꼭 건강히 수업하고 계시길.)
6개월 남짓한 서울 생활이 끝나고 복학을 해야 해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모자란 학점을 채우며 바쁜 4학년을 보냈다. 4학년을 보내며 때때로 서울 생활이 그리웠다.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경험할 수 있는 서울도 그리웠고,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인 강의실도 그리웠다. 그러다가 2학기 때 취업이 됐다. 휴학을 하고 6개월이나마 수업을 들은 이력 때문인지 서울의 아주 작은 신생 출판사에 취직이 되었다. 졸업 전이어서 취업계를 내고 서울로 급히 올라왔다.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생 신입이었던 나처럼 회사도 신생회사였다. 내가 들어오기 전 출간된 책은 한 권도 없었고 직원들 모두가 출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출판 관련 모든 과정을 A부터 Z까지 몸소 부딪히며 해내야 했다. 20대의 패기와 열정만으로 될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았다. 난 기획자였고 편집자였고 기자였고 전화받는 사람이었다. 무언가 계속하고 있는데 결과물은 보이지 않아 회사를 탓했다가 내 능력 부족을 탓했다가 이 길이 내 길이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이것저것 관심사도 많고, 그만큼 쉽게 질려하기도 하는 나에게 유일하게 독서는 꾸준한 취미였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책이 싫어졌다. 다른 출판사들의 잘 만들어진 책을 보는 건 내 능력으론 불가능한 일 같아 질투가 났고, 어떤 책을 읽더라도 내용보다는 책의 만듦새나 목록의 구성을 평가하거나 비문을 찾고 오탈자를 찾는 데만 집중했다.
2년이 넘어가면서 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진로 등 여러 가지 고민이 여러 갈래 방향으로 퍼지고 차곡차곡 쌓였다. 슬럼프가 온 거다. 더 탄탄한 회사로 이직해 출판을 제대로 배우면서 일을 하려고 이직 준비도 했다. 하지만 사실 회사를 옮기고 싶은 마음보다는 자신이 없었다. 더 좋은 회사를 갈 수 있는 자신도 없었고, 이 일을 내가 평생 할 자신은 더 없었다. 맞지 않는 신발에 발을 억지로 욱여넣는 느낌이었다. 내 길인 줄 알고 발을 들였지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년 8개월 만에 퇴사했고, 나를 조이던 불편함도 사라졌다.
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책을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출판 경험이 많은 출판사에서 일을 했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결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어쩔 때는 지나치게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책을 만드는 일은 분명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도 안다. 나에게 맞는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만든 책을 더 열심히 읽는 독자 자리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쩜 저렇게 딱 맞는 옷을 찾고 거기에 능력까지 갖추고 살아갈까 부럽다. 물론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도 고충이 있겠지만 아직 딱 맞는 옷을 찾지 못한 나에겐 부러울 뿐이다. 올해는 좋아하는 일을 부지런히 찾아볼 예정이다. 나에게 딱 맞는 옷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