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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규 Feb 19. 2019

실전적인 사랑


1.
포스터엔 네 사람이 있다. 분명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서로가 아닌 앞만 보고 있다. 심지어 가려진 반쪽 얼굴. 만일 연인과 이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면 안 됐다. 당신은 꽤 눈치가 없는 셈이니.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의 가사를 안다면 더더욱. 클로저는 낭만적인 사랑과 말들, 함께 쌓아 올린 추억들 사이 연인과 함께 잠든 어느 밤. 등 돌린 채 겪는 그 고독과 혼란 어디쯤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신문사의 부고란 담당 기자인 댄은 어느 날 거리에서 연인 앨리스를 만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거리에서 둘만 보이는 운명적인 만남. 그들은 사랑하고, 그녀를 소재로 쓴 소설을 통해 댄은 원했던 소설가로서 데뷔까지 한다. 그림 같은 러브 스토리. 그러나 여기서 영화는 책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 안나를 향해 구애하는 댄을 비추며 그 흉악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앨리스를 사랑하지만 안나도 사랑한다는 댄. 그런 댄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안나는 우연히 만난 의사 래리와 결혼하고, 이야기는 결코 편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2.
클로저를 관통하는 주제는 진실에 관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진실해야 한다. 하지만 진실할수록 서로를 상처 주는 아이러니는 대체 뭘까. 연인이 있는데도 서로에게 끌렸던 댄과 안나는 그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각자의 관계를 파괴한다. 한 번만 섹스해 주면 이혼 서류에 사인해주겠다고 한 래리와의 이야길 고백함으로써 안 나와 댄도 역시 파국을 맞이 한다. 안 나와 헤어졌을 때 래리는 댄에게 버림받은 앨리스와 섹스하고, 그 사실을 댄에게 알림으로써 댄과 앨리스를 파괴한다. 내게 진실을 말해줘. 네 사람 중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그렇게 절실하게 애원하지만, 진실을 들은 후에 남는 것은 파괴된 관계와 부서진 그 잔해를 헤집는 고독뿐이다.


앨리스가 떠나간 뒤 댄은, 알고 보니 앨리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안나는 자신을 비난했던 래리에게 돌아가고, 래리는 댄과의 불륜을 다 알면서도 안나를 소유하기 위해 그 고통을 감수하고 재결합하며, 철 없이 자신의 욕망에만 솔직했던 댄은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무엇이 사랑인가. 이들 중 사랑이란 걸 한 건 누구인가. 진실한 것은 지나치게 우리의 불완전함을 드러내서, 마땅히 완전해야 한다 믿어왔던 관계를 종종 시궁창에 처박는다. 사랑은 과연 우리가 믿는 만큼, 그렇게 아름답고 질서 정연한 것일까?


3.
여기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외면하는 진실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 잠시 좋은 날들은 있다. 상대의 단점이나 갈등은 우리가 사랑하니까로 얼버무려지고, 나 하나만으로 행복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채운다. 연인과의 섹스는 달콤하고 둘만의 공간에서 내 나약함과 욕망은 비로소 완전히 위로받는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행복의 정의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이 충분히 익숙해지기 전까지만 그렇다.


사랑은 지속적으로 시험을 받는다.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약속은 욕망 앞에서 자주 흐려지고, 사랑하니까로 용납되던 이기심이 새긴 상처는 누적된다. 가졌다고 생각했던 상대의 마음이 사실 그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수록 집착하며, 알 수 없는 권태와 초조함이 점차 서로를 파괴한다. 가장 가까웠다고 믿었던 사람이 가장 멀어지는 종말. 그때마다 미칠 것 같지만 또 다르지 않을 것을 아는데 다시 안 할 수도 없는 것. 
우리는 사실 이미 해봤다. 지나온 시간 동안 이기적인 댄도 돼 보았고, 교활하고 지질한 래리도 돼 보았다. 사랑했던 상대들은 나만을 사랑한다면서 어딘가 비밀스러웠던 앨리스였으며, 내 힘으론 어쩔 수 없이 흔들려서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안나였다.


4.
영화의 시작과 끝에 흐르는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는 노래한다. "네게서 눈을 뗄 수 없어. 너를 향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어. 다른 누군가를 찾을 때까지는" 아름답지만 잔인한 진실. 그렇다면 클로저는 그저 사랑의 환상을 비웃는 영화에 불과한 걸까. 그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원한 사랑은 가능할 수 있으나, 그것은 운명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클로저는 여기에 관한 아주 실전적인 대답을 준다. 사랑을 두 사람만의 것으로 지켜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네 사람이 저질렀던 흔한 잘못들에 답이 있다. 변하는 것을 지킬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향해 움직이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타인에게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몸을 향한 집착과 소유욕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결국 클로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지점이 아닐까. 우리는 사랑한다. 단지 그것만으론 결코 두 사람이 언제까지 행복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을 진정으로 얻고 싶다면 그것이 갖는 모든 측면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쉽게 인정할 수는 없지만, 사랑은 변한다. 함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건 결코 완전한 결과로써 얻어지는 물리적인 보상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며 누적된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들을 조금씩 더 많이 지켜나갈 때. 우리는 언젠가 영원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확신은 못하지만. 그러니까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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