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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규 Feb 21. 2019

C 씨의 짝사랑

진심을 건네는 용기에 관하여

C 씨는 꽤 조심스러운 사람으로, 내가 그에게 그런 평가를 내리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 있었다. 나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손짓을 했다가 조금 뒤에 저, 혹시 그 손짓이 무례하게 여겨졌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농담을 한 뒤에 웃지 않으면 그런 종류의 농담을 다신 하지 않는다든지 (그냥 안 웃겼다) 언제나 대화 중에 자신의 뜻은 이러이러한 것이었다고 열심히 해명을 하곤 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요컨대,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고 매 순간 진지하게 노력하는 흔치 않은 타입의 사람인 셈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기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는 스무 살에 무려 7년 동안 짝사랑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한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서 마음을 건넨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고. 이쯤 되면 어디 병이라도 있나 싶지만 세상엔 그런 종류의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가 짝사랑 상대에게 했던 가장 명확한 감정표현은, 너 혹시 얘 좋아하냐고 짓궂게 굴던 친구에게 펄쩍 뛰며 화를 내던 순간뿐이었다. 그걸 그 애가 눈 앞에서 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병신 같았던 순간. 실낱 같은 가능성마저 끝장난 그 사건 이후로도 마음은 7년이나 이어진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병신 같았는지에 비례했다. 한심했던 그 짝사랑이 끝난 건 20대가 절반도 훨씬 지나고, 그 애가 몇 번의 남자 친구를 거치고, 그도 이미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긴 후였다.  


시간이 지나 그는 딸을 가진 아빠가 되었다. 닿지 못했던 짝사랑이 생각난 건 어느 날, 응답하라 1997에서 여자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못 하는 멍청이-라는 대사를 들었을 때였다. 통속적인 대사였지만 잊고 있던 지난날의 병신이 떠오른 C 씨는, 무슨 용기였는지 그래 적어도 내가 그랬다는 사실은 알고 네가 생을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무려 16년 만이었다. 왜 그렇게 그 말이 어려웠는지. 이제 마음의 짐을 덜었어. 좋아. 난 이제 병신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는 그날 처음으로, 그 애도 자길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너 얘 좋아하냐고 물었던 친구 앞에서 펄쩍 뛰며 화를 내던 그때, 자길 좋아하는 게 그렇게 창피한 일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던 그 애 역시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했던 상대에게 거부당했다고 생각했던 순간. 그 날을 기점으로 둘 사이는 16년간이나 이어질 수가 없던 것이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귀여울 만큼 순수한 이유지만 둘 중 누구라도 단 한마디. 사실은 네가 좋아-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사람의 마음은 그 단 한걸음의 차이로 가질 수도 있었던 소중한 걸 영영 잃게 된다.


아마도 그냥 지나간 사랑 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다. 둘이 다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시간도 너무 많이 지났다. 그런데 C 씨는 그 이후로 누구에게나 진심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사실 그렇게 영리해 보이는 일은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다는 건 관계에서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술이다. 마음을 드러내고 약점을 내보이는 사람은 연민을 얻을지언정 원하는 것을 얻기는 어렵다. 재미없는 모양새지만 어른들의 관계 맺기는 대개 그런 식이다. C 씨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무례하지 않고, 말수가 적으며,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아저씨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조금씩 늦지만, 내 진심을 알아봐 달라고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그런 걸 굳이 왜 나한테 설명하냐고 갸우뚱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요지부동이다. 나는 그가 이제야 비로소 정말 중요한 것을 얻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더 이상, 말할 용기가 없어 소중한 무언가를 잃지 않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친구,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겠지. 나는 그런 C 씨를 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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