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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면 티를 내라

잘 울고 잘 웃지만 화는 못 내는 사람

by 김둥둥


여섯 번째 상담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예상치 못 한 전개로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우선 빙고게임을 했다. 나는 아홉 개의 칸을 그린 뒤 키워드를 적었다.


“나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 혹은 나라고 밝히고 싶은 것”을 키워드로 적으면 되는 것이었다. 빙고게임이야 나라 이름이나 과일 이름으로 많이 해봐서 금방 써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키워드 적기는 생각보다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나 자신을 표현하기 적절한 어떤 것을 적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9개의 칸에 다양한 것들을 적었다.




첫 번째 키워드 '웃음'

선생님은 물었다.

"왜 웃음을 적었나요?"

"음.. 잘 웃어서요!"

"이상한 질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혹시 언제부터 그렇게 자주 웃게 된 것 같아요?"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대답했다.

"음.. 아마 5~6학년 때 친구들을 만난 이후로 자주 웃게 되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만난 K와 오랜 기간 친하게 지냈다. 성인이 되고서 멀어지긴 했지만 청소년기를 K와 즐겁게 보냈고, 15살에는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서 행복한 중학교 생활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자주 웃게 된 계기는 친구 때문이었다. 그 전에는 그렇게 자주 웃진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설명하니 선생님은 다시 질문했다.


"그럼 그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웃음을 지을만한 행복한 시기가 없었던 거네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럼 그때 만난 친구들이랑은 어떻게 지냈나요?"


나는 친구들과 함께 지냈던 행복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서로에 대한 사정도 다 알고 있고, 힘들 때 경청해주고, 언제든지 내 편이 되어준다고 말했다. 서로 안 맞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갈등이 생기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고 잘 넘어가고 이해해주며 지낸다고도 말했다. 선생님은 그런 내게 말했다.


"친구들처럼 친밀감이 있고 애착이 가는 관계가 그 전에는 많지 않았었던 거네요. 소속감이나 친밀감이 느껴지는 그런 관계가 사춘기 시기에 생긴 거죠. 사춘기는 친구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때 친구들을 잘 만난 것 같아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자주 웃는다. 별로 웃기지도 않는 얘기에도 잘 웃어주는 편이다. 일부러 웃는 건 아닌데, 미소를 습관적으로 짓게 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는데 보통 그런 내 웃는 모습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웃을 때 너무 해맑게 웃어서 기분이 좋아진다나 뭐라나. 선생님도 내게 정말 잘 웃는다고 말했다.



두 번째 키워드 '눈물(잘 우는 것)'

선생님은 왜 눈물을 적었는지, 눈물을 언제부터 많이 흘리게 된 것 같은지 혹은 눈물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기가 있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남들보다 눈물이 많은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감수성이 풍부해서 공감하거나 감동받거나 여러 가지 감정이 들면 눈물을 잘 흘리기 때문에 적었다고 답했다. 두 번째 질문에는 부모님이 싸우기 시작했던 중학생 시기에 혼자 방에서 자주 울었던 때와 여행을 하다 만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때 흘렸을 때가 기억난다고 답했다.


"눈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눈물이라는 건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라 눈물 흘리는 것을 민망해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눈물이라는 게 슬플 때만이 아니라 행복할 때도 날 수 있는데, 그런 다양한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흘리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나는 행복할 때와 슬플 때, 감동받았을 때 감정을 잘 해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해 전 여행하다 만난 J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잘 우는 나를 보고 자신도 더 잘 울게 되었다고(좋은 의미로)




세 번째 키워드 '티를 안 냄(기분 나쁠 때)"

키워드 '눈물'을 얘기하다가 다른 키워드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은 역시 왜 그 키워드를 적었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말했다. 기분 나쁘거나 서운함이 드는 감정을 바로 티 내는 게 잘 되지 않아서 적었다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이어 말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마다 자신 있는 감정과 자신 없는 감정이 있어요. 자신 없는 감정은 약점 감정이에요. 본인이 다루기 어려운 감정인 것이죠."


"티를 안 내다보면 감정이 쌓이고 나도 모르게 마음에 균열이 생기게 될 거예요. 티를 내면 상대방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할까 봐 괜히 엉뚱한 데에서 통명스럽게 대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가 왜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했을까 싶고 그런 내 표현 방식이 나 자신도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들 거예요."


나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마치 나를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참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살아온 느낌이랄까. 어머니의 인생을 내게도 투영시켜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고 있었던 걸까. 이런 내 습관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선생님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갈등 상황이 싫고 그 갈등 상황을 대하는 게 자신이 없을 수도 있고, 상대방이 안 좋게 생각할까 봐 그게 두려울 수도 있어요. 그렇게 쌓아두는 습관이 생기면 다양한 대처 방법에서 가장 덜 힘든 방법을 선택한 것일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죠. 그렇게 참는 것을 선택하다 보면 참지 못하는 순간이 오고 상대에 대한 마음을 닫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참을 수 없을 때 연인과의 관계가 끝이 나버리죠.”


나는 언성이 높아지는 상황이 무섭다. 그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스물여덟 해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어렵다.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 참더라도 원하는바대로 잘 안될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참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신이 얼마큼 참을 수 있는지 빨리 알아차리고 약점을 관리해야 해요. 연인에게 나는 이런 부분이 약하니까 서로 조심하자고 대화를 하던지..."


"이성관계에서는 내가 많이 참고 있으니까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하고 기대하게 되고, 상대가 내게 먼저 기분 나쁜 게 있는지 물어봐줬으면 싶을 거예요."


"오늘 상담하면서 어떤 생각이 많이 들었나요?"


"음.. 저에게 약한 감정을 깊이 생각해본 경험이 없는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지금보다 더 잘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자신을 희생시키고 소모시키며 참게 되면 스스로가 망가져요.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왜 이런 감정에 취약한지, 어떻게 하면 표현을 더 잘할 수 있는지는 다음 시간에 알아봐요!"

자신 없는 감정과 자신 있는 감정. 그런 게 다 뭐람. 처음 자세히 들여다보는 감정이라 그런지 서툴게만 느껴진다. 자신 없는 감정을 잘 표현하게 된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장기전에 진입하는 나의 연애 그리고 우리의 연애가 가 조금은 더 해피해질까. 물론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담을 하면서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더 좋다. 이런 자기 이해와 객관적 시선을 통해 나와 주변을 이해하게 되면 세상을 조금 더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길러지지 않을까. 마치 두꺼워지지 않고 단단해지는 대나무처럼 말이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김훈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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