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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Kyoo Lee Sep 19. 2020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들

공기, 물 그리고 전기

시작은 공기.


캘리포니아, 오레곤, 워싱턴 이렇게 맞닿아 있는 미국 서부의 세 개 주에서 시작된 산불로 제가 살고 있는 시애틀의 하늘이 재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2년여 전에 차로 세 시간 넘게 떨어져 있는 오레곤 주에서 시작된 산불 덕에 공기 중에 재가 날라다니는 경험을 한 이래로 두 번째 겪는 이상한 하늘이었습니다.


공기 중의 재로 인해, 오래도록 밖에 있으면 건강에 상당히 나쁘다는 보도가 연이어지고, 매캐한 냄새 때문에 집에서도 창문을 열지 못한 채 두 주 가량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지경이 되니 덥고 습하고 답답한 상태로 오랜 시간을 집에만 있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재택 근무를 할 때에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는데, 창문도 못 여는 상태가 되니 둔감한 저도 피로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환기를 할 수 없고 맑은 공기를 마시지 못하는 것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렇게 뿌옇고 매운 냄새가 나는 공기 속에서 살아가던 어느 하루에, 갑자기 예고 없이 집에 물이 끊겼습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어느 저녁 8시에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물이 끊겼습니다.


상하수도 보수를 한다던가 해서 단수가 되었던 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보통은 일주일 정도 전에 예고를 하고, 우리 부부가 직장에 가 있는 낮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들이어서, 이렇게 코로나와 재가 날리는 하늘 덕에 어디 가 있을 곳이 하나 없는 상황에서, 그것도 밤 8시에, 기약없이 물이 끊기는 것만큼 갑작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이날 마침 한인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준비한 재료들로 샤브샤브를 못 만들어 먹는다던지, 조금 쌓여있던 설겆이를 못한다는 것은 크게 마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의외로 변기의 물을 내리지 못한다는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는데도 물이 돌아오지 않기에, 급한대로 변기 물을 내린 다음에 부어넣을 물을 한 가득 사왔습니다. 용무를 보고 물을 한 번 내리고 변기의 뚜껑을 열어 물을 부어넣으니 1갤런 (3.8 리터) 짜리 생수통이 두개하고도 반이 들어갔습니다. 무겁게 이고지고 사온 물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상당히 무겁게 많이 사온 것 같았던 그 많은 물로도 변기를 세 번도 못내린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매일 아무생각 없이 변기를 내릴때마다 이를 다시 채우기 위해 그렇게 많은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결국 다음날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물이 돌아왔고, 그 전까지 버티기 위해 저는 아침 일찍 마트에 한 번 더 가서 더 많은 양의 물을 이고지고 가져와야 했습니다.


마지막은 전기인데, 사실 감사하게도 전기는 실제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부의 대화 속에서만 전기를 잃었었죠. 재가 날리는 공기로 창문도 못 열고 물마저 나오지 않던 그 밤의 후텁찌근함과 끈적거림과 답답함을 선풍기 바람으로 버티며, 자조하듯 서로에게 “이런 때 전기마저 끊겼더라면 참 힘들었겠다” 라고 했었거든요. 전기가 끊어진다고 생각하면 늘 떠오르던 멈춰버린 냉장고도 상상속의 두려움으로만 끝나서 다행이었습니다.


약간의 상상을 더해서, 있을때는 당연하게만 여겼던 공기, 물, 전기를 한꺼번에 잃어보니 이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했는지를 더욱 알게됩니다. 아침 인사가 “여보 오늘도 물이 나와요!” 가 되니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시대에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실제로 느껴지는 상실감은 더 커서 “코로나 블루”라는 말에 우리 모두가 동의합니다.


이 또한 그 동안 당연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던 많은 좋은 것들에 대한 그리움일텐데요,


그럼에도,


코로나로 우리가 많은 것들을 잃었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 재가 날리지 않는 공기가 있고, 변기 물을 내릴때마다 물을 사러가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기가 아직은 남아있어서


감사합니다.


잃어보니 그 소중함을 경험합니다. 그 감사함으로 지금 잠시 잃은 다른 소중한 것들이 때가 차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p.s.

오늘 미국에서는 또 하나의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늘 우리 곁에 있어주시리라 생각했던 “만인의 영웅” Ruth Bader Ginsburg 대법관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Justice Ginsburg는 여성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앞장서서 싸워온 분이었고, 그 진심이 전해져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분이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정치 상황을 생각할 때, 그 빈자리가 어떠한 판결들로 돌아올지, 생각하는 것만해도 두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RBG 를 잃은 것은 공기, 물, 전기가 잠시 끊긴 것과는 전혀 다르게, 아무리 기다려도 되찾아올 수 없는 영원한 상실이기에 마음이 더욱 애려옵니다. 그래도 이러한 “진정한 어른”과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 그 발자취를 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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