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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Kyoo Lee Sep 27. 2020

Seattle Gray (by 이진규)

시애틀의 비내리는 나날에 늘상 보는 하늘입니다


며칠 전에 비가 시원하게 내렸습니다. 가을이 되면 늘 오는 비라서 평소대로라면 그냥 비 오나 보네 했을 텐데, 이날의 비는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산불로 재 날리는 하늘을 청소해주는 비였기 때문입니다. 그 비가 온 바로 다음날, 거짓말같이 2주 동안 꿈쩍 않던 매캐한 공기가 모두 씻겨 내려갔습니다.


시애틀은 비가 참 많이 내리는 도시로 유명합니다.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거의 매일 비가 옵니다. 시애틀과 비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은데, 시애틀에서 커피집이 많고 사람들이 커피나 차를 좋아하는 이유가 비 때문이라는 등, 사람들이 실내에 오래 있어야 되기 때문에 독서율이 미국 내에서도 가장 높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늘 비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자살률 또한 미국 내에서 가장 높은 편이라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듣습니다.


2009년에 각자의 사정으로 우리 부부는 각기 다른 시기에 시애틀에 처음 도착했습니다. 저는 학교 시작에 맞추어 매일 파랗고 맑았던 8월에 도착을 했지만, 아내는 10월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 해에는 아내가 도착을 했던 10월 13일 월요일부터 우기가 시작되어서 이듬해 5월까지 매일 비가 왔었습니다. 그 해가 기록적으로 비가 많았다고는 하지만, 낯선 땅에 처음 와서 몇 달을 내내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면서 아내는 ‘이게 도대체 뭔가’ 했다고 합니다. 이 가을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아내가 도착했던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처음 시애틀에 왔을 때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가 부슬비같이 조금씩 내리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우산을 쓰기보다는 그냥 비를 맞고 다니거나 방수 점퍼 등을 많이 입고 다녔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부의 쇼핑 1호도 알록달록한 색깔의 방수 점퍼였는데요, 그때는 기온차가 크지 않은 가을 겨울 다음 해 봄 내내 그 옷을 뒤집어쓰고 다닐지 정말 몰랐습니다.


비 맞는게 익숙한 시애틀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일까요?


이렇게 비 내리는 가을 겨울 봄 중에서도 가을에 가장 비가 많이 내립니다. 시애틀에서는 “가을 햇살” 이라던가 “높고 높은 가을 하늘”과 같은 말이 참 낯설게 됩니다. 가을이면 햇빛은 구경하기 힘들고 하늘은 늘 회색빛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 가을을 재미있게 해 줄 거리들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호박 수확철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은 호박을 파내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어른들은 pumkin spice latte와 같이 가을에만 누릴 수 있는 음료들을 마십니다.


그래도 한 해 한 해 살면서 이 도시와 정이 들다 보니 어느덧 그 가을 하늘과 부슬비가 좋아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들뜨게 하는 햇빛 찬란한 여름도 좋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가을의 비와 하늘도 좋아지고,


같은 커피를 마셔도 이 가을에 음미하는 커피는 뭔지 모르게 더 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여름에 신나게 놀다가 (실제로 놀러 가든 날씨가 좋아 마음만 들뜨든) 가을이 되어 학교도 개학을 하고 새로운 회계연도와 대학의 academic year 가 시작을 하는 때이다 보니, 이제 뭔가 새롭게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느슨한 긴장감도 좋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부부는 이렇게 차분하고, 고요하고, 깊고, 들뜨지 않아 또 좋은 가을에 매일 보는 하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먹구름도 아닌 엷고 밝은 회색의 그 구름 낀 하늘을 “Seattle Gray”라고 멋대로 이름 붙여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색깔의 하늘을 보면 마음이 좋아집니다. 여름의 파란 하늘도 물론 좋지만, 가을의 하늘도 친근합니다.


2009년에 처음 비 내리는 시애틀을 만났던 어느 하루와 다르게,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기후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비가 덜 와서, 가을 겨울 봄에 비가 내리지 않는 날들이 늘은 반면, 비가 오는 날은 더 많이 더 세게 내려서 낯설기도 합니다. 비가 세게 와서 저도 이제는 우산을 쓰고 다른 사람들도 꽤 많이 우산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시애틀의 가을 하늘은 설레게 하는 차분함이 너무 좋습니다.


코로나의 충격 속에, 맑은 날이 많았던 봄과 여전히 찬란했던 파란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빼앗기듯 지나가서 아쉽습니다.


이 가을은 빼앗기지 말고 누려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 계절을 추억하는 글을 쓰고 글을 위해 사진을 찍는 것도 어쩌면 올해의 가을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Seattle Gray

p.s.

아내의 흔쾌한 동의로 이제부터는 아내의 글도 함께 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주제 혹은 같은 주제로 서로 전혀 상의하지 않고 아내와 저 두 사람의 생각을 “시애틀에서의 어느 하루” 매거진 안에서 나누어보려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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