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시의 골목이 유리처럼 부서진다

by 진경


겨울이면

하루가 일찍 부러진다.

다섯 시, 골목이 유리처럼 기운다.

건물 벽이 서로를 떠받치지 못하고

천천히 안쪽으로 쏠리는 시간.


버스에서 내렸다.

익숙한 길인데 발이 낯설다.

어둠이 먼저 와 골목의 모서리를

슬쩍 지워놓았다.

빛이 사라진 자리마다

윤곽이 조금씩 어긋난다.


어릴 적 겨울이 갑자기 냄새로 왔다.

석유난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안쪽,

아버지 무릎에 앉았을 때

스웨터에서 나던 먼지와 담배,

낮잠의 체온이 섞인 냄새.


장갑을 벗으면

손가락 끝이 하얗게 죽어 있었다.

입김을 불어넣어도 소용없어

그냥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감각이 돌아올 때의 따끔함—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기억은

윤곽을 잃는 게 아니라

다른 것과 자꾸 섞인다.

석유난로의 파란 불꽃이

브라운관 속 눈보라와 겹치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웃집 텔레비전에 묻힌다.


그래서 기억은 부드러워지는 게 아니라

점점 날카로워진다.

찌르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깊이 박힌다.


골목 어귀에 섰다.

가로등이 켜지기 직전,

세상이 잠깐 투명해지는 순간—

나는 유리 속에 갇힌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이 오면

골목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저 천천히 접히면서

안쪽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

오래전 겨울도,

죽은 손가락 끝의 따끔함도,

다 거기 있다.


부서지는 건 나다.

매일 저녁 다섯 시,

똑같은 골목을 지나면서

조금씩 금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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