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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Jul 09. 2021

연애에서도 자유와 평등이 필요하다

결국 나를 찾는 것이다

 우리가 오랜 기간 연애를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자유와 평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자유가 상대방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꽤나 자유롭다. 완전한 자유가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같은 사랑 속 어느 정도의 구속이 있을 수도 있고, 또 거기에서 사랑을 느끼는 사람도 종종 만나볼 수 있다. 다만 연인 사이에서 각자가 가진 자유의 기준이 사뭇 비슷하게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아주 쉬운 예로, 우리는 이성과 사적인 술자리를 하지 않는다. 각자가 그런 자리를 딱히 만들지 않는다. 나도 그럴 생각이 없고 일이 아니고서야 그런 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다. 연락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어디에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일일이 보고하지 않는다. 저녁마다 전화를 붙잡고 사랑을 속삭이지도 않는다(다른 커플들이 밤마다 통화하는 게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것이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세 번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고 하루가 끝날 때도 있다. 이렇게 되려면 내가 함께 하지 않는 순간,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 속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남자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한 번도 나이 차이를 빌미로 삼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나를 두고 '너'라고 칭한 적도 없다. 이 사실이 평등의 맥락에서 나올 일이 맞나 싶기도 하고, '너'라고 했어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나는 왠지 거기에서조차 나에 대한 이 사람의 기본 성정을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가 아니라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이렇게 해야지, 내가 너보다 많이 아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는 식의 예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오빠라고 칭한 적도 없다. 일부러 신경 써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의 성격이 그런 것이기는 하다.

 물론 나 역시 남자친구가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막 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직관계의 근거가 되곤 하는 나이 차이가 있는 경우,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 수직적 관계를 지향하지 않아야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사이에는 갑을 관계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 속에서 내가 갑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상대방이 갑이라고도 생각해본 적 없다. 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각자가 가진 사랑의 크기를 따져 비교하지 않고, 상대방의 행동을 보며 '사랑하면 이래야 돼, 저러는 걸 보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해석하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가장 우선이다. 상대방이 나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랑처럼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지켜야 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고, 내가 나로 설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비로소 좋은 연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우리의 고유한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기까지, 연애에서도 자유와 평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는 헤어짐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등바등 자유와 평등을 사수하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적당한 구속과 가끔의 으스댐 정도는 귀여우니까! 언제나 나를 잃지 않는 것, 내 모습을 찾아나가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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