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잘 사는 진리 Dec 14. 2021

드디어 옷장에 내가 고른 옷이 가득 찼다

3개월 속성 패션 독립

이따금씩 옷장을 열고 뭘 입을지 눈알을 또륵또륵 굴리다가 한숨을 뱉었다.

 '참, 어떻게 내가 산 옷이 하나도 없냐?'

 

 나는 옷을 잘 입는 사람이 부러웠다. 눈에 띄는 옷을 입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걸 알고 찰떡같이 찾아 입는다는 게, 자기를 잘 알고 옷을 입고, 그렇게 입은 옷에 자기의 색깔이 드러난다는 게 부러웠다. 멋있으니까! 하지만 딱히 옷을 잘 입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에는 옷을 비롯한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는 어른들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그냥 교복을 입었고, 나다니는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옷을 신경 써서 입을 것도 없었다. 다른 애들은 교복을 이랬다가 저랬다가 후드도 입었다가 조끼도 입었다가 난리였는데, 나는 옷에 손을 전혀 대지 않고 펑퍼짐하게 입었다. 귀찮아도 복장 규정대로 교복 자켓을 입고 외투도 입었다. 내 교복 치마는 규정에 명시된 기준을 한참 넘겼다. 그때 당근 마켓이 있었다면 당근이 잘 됐을 거다. '교복 나눔해요~(수선X)'

 수학여행 같은 걸 갈 때는 짧은 옷, 구두 등은 안 된다는 조건이 수학여행 관련 통신문에 명문화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옷은커녕 그런 옷에 가까운 옷조차 입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몰래 짧은 반바지를 챙겼다가 선생님한테 혼났다. 나는 적발과 훈계의 시간이 싫었다. '놀이공원에서 노는 게 이 수학여행의 본질인데, 이게 뭔데 한 시간을 잡아먹어? 알만한데 반바지 챙겨 오는 쟤도 어지간하고, 몇 명의 애들 때문에 이런 날까지 학급 전체를 잡아두고 있는 선생님들도 어지간하다, 정말. 어휴'. 아주 그냥 지만 잘났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다는 아닌데, 오히려 그들이 투사(?)였을지도.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그때의 나는 그랬다(지금 돌아가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항상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는 모르는데, 나중에 어른이 돼서 보면 학생답게 참한 애가 이뻐 보인다나? 지금은 모른다나? 그 말을 믿어서 수선을 하지 않거나 단정한 옷만 입은 건 아니었다. 아니, 살짝 믿었나? 모르겠다. 어차피 때를 지나고서야 아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걸 모르는 그 상태가 청춘이니까.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모든 것을 대학생이 된 이후로 넘긴 채, 괜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때를 기다린 것 치고는 호랑이가 못 되었다는 게 뼈 아픈 결론.

 

 그렇게 기다리던 대학생 신분을 얻었다. 그때는 또래가 그렇듯이 지하상가 같은 곳들에서 옷을 사 입었는데, 마치 어린아이들이 무채색의 옷과 유채색의 옷 중 유채색을 고르는 것처럼,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거나, 옷을 서로 조화롭게 맞춰서 입기보다는 하나하나 예뻐 보이는 걸 골라잡았다. 내가 입는 옷에는 질서가 없었다. 그렇게 조잡하게 산 옷을 입고 고향에 가는 날에는 엄마한테 아주 혼쭐이 났다. 제대로 된 옷을 좀 입으라며 옷가게에 끌려가서 옷을 한 아름 얻었다. 딱히 생각이 있어서 옷을 사는 게 아니다 보니, 엄마의 공격에 대응을 못하고 밀려났다. 엄마가 사준 옷이 괜찮아 보여서 그냥 엄마가 사준 대로 입었다. 그런데 엄마가 사준 옷은 대체로 무난하고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이어서, 종종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또 내 눈에 괜찮아 보이는 옷을 하나씩 사봤다. 옷에 돈을 쓰는 게 아까워서 여전히 저렴한 옷을 샀다. 옷에 대한 센스가 없다 보니 그런 옷들은 내가 갖고 있는 옷들과 안 어울렸다. 그러면 또 다음번 고향 방문 때 엄마한테 또 혼나고 또 옷을 얻어 입었다(옷을 얻으려고 의도적으로 없어 보이게 입고 간 건 아니다). 그렇게 내가 내 돈을 주고 사 입는 옷은 점점 더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취업을 하게 되었고, 복장 규정상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어야 해서 또 엄마가 사준 무난한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엄마가 옷을 꽤 많이 사줘서 엄마가 사준 옷 만으로 옷장이 다 찼다. 그렇게 옷을 준비해서 입사를 했는데, 갑자기 이듬해에 복장 자율화가 이루어졌다. 이미 사버린 옷이 아까워서 그냥 있는 옷들을 입고 다녔다. 연고가 없는 곳에서 지방근무를 하다 보니 가족도 친구도 없고, 회식이 잦다 보니 나만의 저녁 시간이랄 것도 딱히 없어서 옷을 예쁘게 입고 싶은 마음 따위는 생겨나지 않았다.

 딱 한 번, 내 맘대로 옷을 산 적이 있긴 했다. 입사를 한 다음 해에 스페인 여행을 갔었는데, 그때는 싸구려든 뭐든 딱히 상관도 없을뿐더러 기분을 낼 수 있는 옷이면 된다 싶었다. 검지 않고 희지 않은 옷을 입고 싶었다. 빨간색 옷도 입고 싶었고, 알록달록한 옷도 입고 싶었다. 출근할 때는 절대 입을 수 없는 옷을 사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냥 입어보고 싶었던 옷을 샀다. 당연히 쇼핑을 할 때도, 여행을 가서 그 옷을 입고 신나게 놀 때도 매우 즐거웠다! 그게 사진에도 잘 나왔는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여행 사진을 보고 놀라워했다. 네가 아닌 거 같다고(좋은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여행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주어진 일이 아닌 다른 것들에 관심을 쏟으면서 스스로를 즐겁게 해 주면 좋았을 텐데, 왜인지 나는 그냥 갇혀있었다. 그러다가 서울로 발령이 났다. 남자친구의 랜선 응원이 아닌 실물 응원도 받을 수 있었고, 한동안 만나기 어려웠던 친구들도 다시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더 이상 다른 핑계를 대고 나를 방치할 수 없는 때가 온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회사로부터 확실하게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후에는 좀 더 명확해졌다. 한동안 각종 공제와 대출 원리금 상환 후 월급 실수령액의 반을 월세로 내면서 생활비를 비롯한 지출을 최소화하느라 꽤 쪼들리게 살았는데, 몇 달 저축을 안 한다고 쳐도 큰 문제는 없을 테니, 돈을 써서 인생의 재미를 찾아보기로 했다. 지나가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슬럼프가 지나고서는 운동도 좀 했겠다, 엄마가 사준 옷, 회사에 입고 가려고 산 옷이 대부분인 내 옷장을 내 돈을 써서 내 의지로 산 옷으로 채워보기로 했다. 일명 패션 독립! 스물여덟 여름의 끝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돈만 쓰면 되는 게 옷 입는 일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상의를 사려니 그에 맞는 하의도 사야 했고, 신발도 필요했다. 똑같은 흰색 운동화도 종류가 다양했다. 패션은 옷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악세서리 같은 것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처음에는 돈을 팡팡 쓰는 게 꽤 즐거웠는데, 나중에는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우세한 감정은 즐거움이긴 했다. 평일에는 온갖 앱을 뒤져 입을 옷을 찾아보고 나에게 어울릴 법한 스타일을 찾아보느라 눈이 아릿해질 정도였고, 주말에는 산책 삼아 갈 수 있는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돌아다녔다. 다행히 예전보다 세상이(?) 좋아져서 유튜브를 조금 뒤적거려보면 옷을 잘 입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감각이라는 게 쉽게 길러질리 없겠지만, 패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만든 법칙이나 공식같은 것도 있고, 예시도 충분해서 따라하는 걸 잘해보면 해볼만하겠다 싶었다. 다행히 자켓이나 셔츠, 슬랙스를 좋아하는 정도의 선호는 있어서, 그걸 토대로 색이나 실루엣의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웠다. 패션 유튜버나 스타일리스트들은 정말 멋있었다.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써?' 할만한 디테일들을 모아 멋진 꿀팁들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에게 그 지식과 지혜를 나눠주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아 더 빛났다. 나는 옷 입는 법을 배우려고 했는데, 세상에 포진한 멋진 사람들을 보며 성공한 삶을 사는 법도 어렴풋이 배운 것 같았다.

 

 그렇게 세 달 정도, 옷을 내 뜻대로 사고 입어보니 몇 가지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우선, 무엇보다, 그냥 내 기분이 좋았다. 하루하루의 시작이 재밌어졌다. 어쨌든 나는 출근을 하는 사람이니 어찌됐든 매일 옷을 입고 현관을 나서야 하는데, 전에는 옷을 주워 입고 출근을 하는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챙겨 입고 출근을 하는 느낌이다. 대충 입는 옷이 아니다 보니 하루의 기분도 전반적으로 상향되었다. 원래 입던 스타일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내 의지로 산 옷이라는 게 달랐다. 옷장에도 내가 좋아서 산 옷들이 가득 들어차니, 뭘 입을지 아침마다 설렜다. 그렇다고 엄마가 사준 옷을 버리진 않았다. 엄마가 사준 옷들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다가 퀄리티가 좋은 옷들이라 버릴 게 없었다. 난 특이 취향도 아니고, 반항을 하는 게 아니라 독립을 하는 거기 때문에, 엄마가 사준 옷을 굳이 갖다 버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조화롭게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소화 하는 것이 더 독립의 취지에 걸맞았다.

 둘째로, 회사의 동료나 선배들한테 농담처럼 '저 이제부터 패션리더 될 거예요!'라고 이야기하고 다녀서 그런지 친한 사람들이 변화를 눈여겨 보고 알아봐줬다. '오, F/W 시작 된 거야?'랄지, '야아 요즘 너 못 보던 옷 많이 입고 온다?'라는 말부터 '어머, 그거 어디서 샀어? 나도 그런 자켓 하나 사고 싶은데 알려줘!' 등의 말도 들었다. 평소에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선배에게서 메신저가 오기도 했다.

 - 오, 오늘 옷 예쁘네요. 핑크가 잘 어울리네.

 - 오? 선임님이 인정해주시니까 기분이 좋구만요?

 - ㅇㅇ 요즘 확실히 신경을 좀 쓰고 다니네. 그렇게 돈을 써봐야 돼. 나는 구두에 눈이 돌아간 적이 있었어요. 한 켤레에 70만 원짜리 구두를 다섯 켤레를 샀지.

 - 엑? 그러면 350만 원인데요? 다섯 켤레 다 잘 신으셨어요?

 - 그럴리가... 하나만 신고 나머지는 결국 다 버렸지ㅋㅋㅋㅋㅋㅋ

 셋째, 아예 예상치 못한 재미도 있었다. 여러 가지로 공부한 걸 블로그에도 올렸는데, 몇몇 사람들이 본인에게도 도움이 됐다며 고맙다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사진으로는 올렸지만 글로 설명하지 않은 아이템에 대해서 물어오기도 했다. 패션 리더가 되겠다고 한 건 허세였지만, 그래도 한 명에게라도 도움을 줬다니 흐뭇해서 이후로도 새로 산 것들에 대해서 꾸준히 블로그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이건 정말 생각지 못한 건데, 엄마도 내가 입은 옷들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평생 내 의지로 산 옷이 한 번도 엄마 마음에 들었다고 한 적이 없어서, 이번에도 당연히 엄마 마음에 안 들 줄 알았다, 엄마한테 '엄마! 이제 나 내가 옷 다 사서 입을 거다~ 나를 말릴 수 없다~ 엄마가 마음에 안 든다고 뭐라해도 이제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다~'라고 이야기 하긴 했어도 엄마 마음에도 들면 좋은 거다. 엄마가 이제 돈도 좀 쓸 줄 알고 제대로 입는 거 같다고, 독립 성공했다고 말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참, 내 삶에서 중요한 주변인인 남자친구는 색깔도 화려하고 패턴도 화려한 옷을 예뻐라 하는데, 내가 일련의 연구 끝에 입는 옷이 남자친구가 예쁘다 할 옷은 아니다. 내가 큰 맘 먹고 산 하늘색 니트에 대해서는,

 "21세기 할머니 같아ㅋㅋㅋㅋㅋㅋ"

 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근데 기분 나쁜 게, 거울을 보면 묘하게 뭔지 알 것도 같긴 하다). 남자친구는 한쪽은 초록에 끈은 노랑이고, 다른 쪽은 파랑에 끈이 주황인, 짝짝이 조던 운동화를 즐겨 신는다. 그런데 그걸 선물해준 사람은 나다. 나는 그게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길래 결제를 했다. 같이 나이키 매장을 가면 이제는 내가 먼저 가장 특이한 신발을 골라서 '이거 어때? 이거 신어봐' 한다. 그럼 또 내가 보기에는 뭔지 모르겠지만 본인만의 기준이 있는지, '그건 아닌 거 같아'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또 약간의 승부욕이 발동되어서 '그럼 이거는? 그럼 저거는?' 한다. 나도 그의 취향을 존중하고, 그도 나의 취향을 존중한다. 한 번은 내가 산 옷에 대해 '그건 진짜 별론데?'라고 말하길래, '아, 뭐야! '진,짜!' 별로야? 그럼 반품할래!'라고 했더니, 남자친구는 '아, 왜! 내가 사주는 것도 아닌데 내 맘에 안 드는 거랑 상관 없잖아!'라고 했다. 맞다. 나에 대한 남자친구의 관심사는 옷이 아니고, 나도 남자친구 마음에 드는 옷을 입으려고 한 건 아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 반대도 똑같이 성립한다. 굳이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남자친구가 내 독립의 도우미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만난 그 누구보다도 독립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나의 독립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

 

 사실 예산을 한 달치 저축 포기로 삼았는데, 세 달치 저축이 포기되었다. 비싼 값을 치뤘지만 3개월 속성으로 패션 독립을 했으니 만족스러운 걸로.

이전 22화 지금 당장 하루를 가장 쉽고 빠르게 바꾸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