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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Dec 20. 2021

미움받을 용기를 버려도 좋아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방법

 주말에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한 친구에게 회사 상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 다른 친구들이 말했다.

 "야, 주말에 웬 업무 전화야? 너무 매너 없다. 너 없으면 회사가 안 굴러간대? 받지 마."

 "어... 근데 난 그냥 받는 게 맘 편해!"

 그 친구는 이어 말했다. 회사에서는 평판이라는 게 순식간에 형성되고, 본인은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고 싶다고.

 나는 그 친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요즘같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를 좋아하면 되고,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게 옳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다니. 그런데 사실은 나도 그 친구와 같은 생각이다.


 이제 너무 유행이 지나버렸나? 대학교 3학년, 4학년 정도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대유행했다. 그 책을 읽고 나는 한때 미움받을 용기를 갖지 못한 내가 미웠다(나는 인생 전반적으로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그때는 자존감이 낮았나 싶기도 하다).


 사실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 미움받을 용기인 것 같다. 마음에 안 드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 나한테 못되게 말하고 필요 이상의 것을 부탁하는 사람에게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 무언가를 탓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는 '사이다'라는 단어는 미움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원하게 할 이야기하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또 막상 나에게 그 상황이 닥치면 나는 사이다가 아닌 고구마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이다에 대리 만족을 느끼고 박수를 보내는 게 아닐까? 물론 미움받을 용기를 꼭 상대방에게 쏘아붙이는 걸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 그냥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난 신경 안 써요. 행복해요'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그 편이 사람들이 더 갖고 싶어 하는 멘탈일지도 모른다. 해탈과 무관심 그 사이 어디쯤의 경지랄까?


 내가 내 자신을 미워한 것은 미움받을 용기를 갖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의 나는 뭐든 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때라, 미움받을 용기도 잘(?) 갖추고 싶었다. 사실 주변에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덜 익숙해진 걸까, 가끔씩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할 때였다. 그때는 미움의 잣대도 내 맘대로였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좋은 사람이 못 되어 주면 미움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거리를 뒀다. 상대방이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이 나를 매섭게 비난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싫어 관계를 외면하기도 했다.


 미움받을 용기를 얻고 나서 괜찮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게 안 됐다! 내가 진짜 행동의 자유를 얻은 것은 오히려 '난 미움받고 싶지 않나 봐, 나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중요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미움받고 싶은 사람은 없어. 그러니까 용기씩이나 가지라는 거잖아. 나는 가능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안 받고 싶은데?'

 '크게 힘들지 않은 때까지는 해보자!'

 자칫하면 미움받을 수 있는 상황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니 미움받을 상황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차라리 '미움받을 용기 같은 거 없는데!' 하면서 내 마음을 따르니 나도 덜 불편하고, 상대도 편해졌다. 미움받기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이 '지금이 바로 미움받을 용기를 발휘할 때야!' 하고 행동하면 어색하기만 하고, 미움을 안 받았을 상황도 이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움받을 용기를 어정쩡하게 발휘했다가 진짜로 미움을 받게 되면 마음만 불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와는 달라진 게 있다면, '사랑받고 싶어'가 아니라 '미움을 안 받고 싶어'가 된 것이다.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관계가 포화상태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더 이상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적이 있다. 사랑이고 뭐고 분노의 역치를 넘어보니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되었다.

 '사랑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고, 미움받지 않는 선에서 정리하자.'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것은 내 방식대로 '미움'의 기준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상대와 조금 더 깊은 대화를 해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때는 미움을 받든지 애를 쓰든지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내 생각을 더 잘 말하고 상대의 말도 더 잘 들어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미움을 덜 받는 방법이기도 했다.


 미움받을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미움받을 용기를 갖지 못한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나같이 미움 안 받는 게 속 편한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자꾸 다른 사람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마'라고 하는 남의 말을 듣는 게 더 스트레스다. 문제가 아니던 것도 문제라고 하면 문제가 되는 좋은 사례다. 강한 작용에 의해 내 마음이 바뀌기 전까지는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상태로 되는 게 쉽지가 않다. 썩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임계점에 다다르면 알아서 정리가 되기도 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자.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그 말을 들어야 하나 혹하지 말고,

 "난 그냥 이게 좋아!"

라고 말하자. 그게 더 멋진 거라고 확신은 못하겠는데, 그게 나의 정신 건강에 좋은 건 맞는 듯!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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