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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Feb 21. 2021

계산기 좀 두드려보면 나오는, 집

주택 매매에 대한 어머니의 조기 교육


 우리 엄마 이야기



 다음 집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고자 합니다. 앞으로의 집도 마찬가지이지만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집을 증여받은 것도 아니고, 현금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직장인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대출을 활용하고, 조금 저축한 것을 보태서 집을 구매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출을 이용하여 집을 사는, 어쩌면 용기에 가까운 것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큽니다. '만 25세 생애 첫 주택 구입 이야기'를 보시면, 어머니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사실 '내 집 마련'을 어머니가 도와주신 부분이 너무 커서 이런 이야기들을 제 이름을 통해 글로 남겨도 되나 하는 고민도 들 정도이지요. 그만큼 어머니가 저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이제는 그 지식과 지혜가 제 것으로 넘어오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요.


 생각해보면 경제관념이나 집에 대한 생각 등은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일반화는 어렵겠으나, 일평생을 저축만 쭉 해오던 부모님을 둔 사람은 주식이라도 할라 치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고도 하고, 어릴 때부터 전세로 살아왔던 사람은 집을 살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주로 전세를 고려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가 집에 관심을 갖게 된 것 또한 어머니의 영향이 큽니다.


 

이다모삼천지교



 부모님과 저, 우리 세 가족은 제가 7살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작은 도시의 촌 마을에서 대지 200평에 30~40평대의 주택에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6남매 중 장남이신데, 집은 장남에게 물려주시겠다는 할머니의 고집이 있었거든요. 제가 한참 어릴 때의 이야기라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어쨌든 저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집에서 20분씩 매일 어머니, 아버지께서 돌아가면서 자가용을 이용해 태워주셔야 하는 곳에 살았어요. 호오, 오랜만에 그때를 떠올리자니 학교에 가기 전에 어머니께서 아침으로 만들어주셨던 크림 리소토가 생각나네요.
 
 그렇게 시골에서 어린 저를 시내 초등학교로 5~6년을 매일같이 실어 나르던 어느 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집을 옮겨 교육을 한 이야기처럼, 어머니도 중학생이 되는 딸의 교육을 위해 이제는 학교와 학원이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어요. 매일 학교에 태워다 주는 데에 시간 들지, 에너지 들지, 기름값도 어마어마하게 들었지요. "그렇다면 조금 모아둔 돈에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면 어떨까?" 생각하신 거죠. 요즘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초등학생일 때는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통장과 현금을 일괄 수거하여 저축을 해줬어요. 저축왕에게는 상도 줬죠. 저는 그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집에 대한 가치관을 세우는 데에 큰 기점이 되는 집에 그 돈을 보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통장에 들어있던 1000만 원에 대출을 받아 작은 빌라를 하나 구입하셨어요. 대출이자를 계산해보면 답이 나오는 구조였습니다. 왔다 갔다 드는 비용보다 대출이자를 내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었던 것입니다.



 묻고 더블로 가!



 이때가 2006년이었는데요, 당시 은행은 쉽게 돈을 빌려줬다고 해요.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구조이지만, 지금보다는 높은 8~9%대의 이자로 소득이 없는 전업주부에게도 돈을 빌려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당시 제가 다니던, 그 지역에서는 나름 좋은 신설 초등학교로 손꼽히던 학교까지 꼬맹이 걸음으로 5~10분, 당시 제 고향 일대를 주름잡던 입시학원까지 5분 정도의 거리에 10평 내외의 집을 구했습니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생활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와 어린 제가 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요즘도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는 주거환경을 따질 때에 중요한 기준이 되지만, 용어만 근래에 등장했다 뿐이지, 사실 생각해보면 학교와 직장에서 가까운지는 언제나 좋은 집의 기준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좋은 집은 대체로 남에게도 좋은 집이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의 가격과 위치를 고려해 우리가 살던 집 말고 그 빌라의 다른 집도 매수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위치가 좋다 보니 월세, 사글세 회전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 집은 월세를 주고, 한 집은 직접 거주하면서 당시 전업주부로서는 꽤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여 저를 키우셨습니다. 시골의 집도 나중에는 월세를 줬지요.


 아버지는 직업운이 좋지 않으셨던 편이라 소득이 불안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주택 매매라는 도전은 제 성장에 꽤 큰 경제적,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내심 우리 집에 집이 3채나 있다는 게 뿌듯하기도 했고 나도 나중에 좋은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도 품게 되었거든요.

 요즘도 가끔 어머니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소름이 돋을 때 어머니께 여쭤봅니다.
 "엄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그런 마음을 먹은 게 암만 생각해봐도 신기해."
 그러면 어머니께서 쿨하게 답하세요.
 "계산기 두드려보면 답 나오는 거였는데, 뭐~"

 

 그리고는 감자를 캐는 것처럼 그때 어머니가 겪었던 일들, 그때 하게 된 생각들, 주변의 시선과 갖은 수모들, 그러니 엄마의 딸인 저에게는 어떻게 교육을 하려고 하셨는지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주렁주렁 열립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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