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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Aug 01. 2022

혹시 착한 아이가 되기 싫었던 건 유행 때문인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어, 이건 내 얘기다. 소름이다' 한 사람들이 나 말고도 꽤 많지 않을까?

그때부터였다, 내 착함을 문제 삼은 건.


그 전에는 착한 게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물론 진짜로 착해서 문제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딱히 착하게 군 게 도움이 되지 않은 적도 없었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게 대응하느라 피곤함이 따라오긴 했지만, 인복이 있는 편인지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게다가 사실 나에게는 착하지 않은 면모도 많다. 질투심도 많고, 착함과 옳음을 혼동하여 내 행동을 억지로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접한 그때부터 착한 아이 콤플렉스와 나의 착함이 강하게 인식됐다. 콤플렉스의 증상에 맞춰서 착해서 문제였던 순간들을 짜 맞추고 있었으니.


요즘 드는 생각은, 이 마저도 한때의 유행 같은 거였던 건 아닐지, 내가 그 유행에 휩쓸려서 스스로를 불쌍하게 바라보고 있던 건 아닌지. 그래서 어디에선가 억지로 모나게 행동하려고 했다가 되려 상처받은 건 아닌지 하는 것들이다.


'착함'이라는 개념은 막연하다. 그저 착해서 나쁠 게 있나? 착하다, 나쁘다의 구분은 도대체 어떻게 짓는 걸까. 사람들이 문제 삼는 착함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에 가깝다. 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마다하는 것이다. 착한 성격을 통해 얻은 걸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이득이 되는 일이 많았다.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올 때는 친절한 게 억울할 때가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착한 성격은 긍정적인 상호작용으로 돌아왔다. 물질적인 공세를 받든, 정서적인 지지를 받든 좋은 일이 생기곤 했다. 물론 그게 진정 필요한 것이었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은 없다.


그나저나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착한 어른 콤플렉스도 아니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도 아니고 왜 착한 '아이' 콤플렉스일까. 아이 때 살아남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행동했던 것들이 남아 자신의 마음을 따르지 못하고 과하게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른과 아이의 구분은 일견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적인 것이다. 어른에 비해 어리면 아이가 된다.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경험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나는 본래 거절하는 것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거절할 만한 부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에게 큰 부담이 아닌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어쩔 수 없이 습득하게 되는 게 거절하는 법이었다. 내가 들일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들고, 득실도 따지는 여러 군상을 만나며 학습을 하다 보니 거절하는 법을 느리게나마 배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서른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들이닥친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어른이 되고 경험이 늘면서 낫게 되는 정도였던 건데 한동안 내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 마치 문제는 문제 삼아서 문제라는 말처럼 그랬던 것이다.


나름대로 어른이 되어 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체면이라는 굴레로부터 독립해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나에게는 좋은 일인 건 맞는 것 같으니 만족! 짜 맞추고자 하면 무수히 많이 맞아 들어갈 콤플렉스들에 굳이 나를 내팽개치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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