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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Aug 08. 2022

10년 만에 밤을 새운 소감

나에게 이런 열정이 있었나

오랜만에 밤을 새웠다. 20살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면서 밤샘을 거뜬히 해냈던 나지만 이제는 밤을 새운다는 건 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운 건 온라인 강의 작업 때문이었다. 작업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을 다시, 또다시 촬영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떤 영상은 얼굴이 못 생겨서 다시 찍고, 어떤 영상은 생각지도 못했던 소음이 들어가서 다시 찍고, 어떤 영상은 기억도 안 나는데 발음이 뭉개져서 다시 찍었다. 똑같은 걸 세 번째 찍을 때에는 나 자신에게 화가 잔뜩 났다. 에어컨 소리가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아서 에어컨을 끄고 했더니 쪄 죽을 것 같아서 또 화가 났다. 생애 처음으로 내 머리를 어디엔가 콱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번째부터는 그 마저도 해탈의 경지에 올랐지만.


남자친구가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나에게, 그렇게 조금 자다가 심근경색이 온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어울리지 않게 잔소리를 했다. 본인도 컨디션 똥망이면서. 나는 아직 젊으니까 며칠은 괜찮겠지 싶다가도 좀 무서워서 잘 자고 싶었는데, 마감 하루를 앞두고 결국 철야를 해버렸다. 결과물은 100%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95%는 마음에 든다. 아마 피드백이 올 거고, 또다시 작업을 해야겠지? 괜찮다. 나는 할 수 있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나에게 있어! 나는 나에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최고가 될 수 있다!


그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했다. 잘 해내고 싶어서 받는 긍정적인 스트레스 같은 거긴 했는데, 며칠간 단 게 어지간히도 당겼다. 가끔은 식욕에 져주고, 가끔은 안 그래도 둥그런 얼굴 더 땡그랗게 나오기는 싫어서 참았다. 이제는 다 했으니까 떡볶이를 먹을 거다. 김밥도 시켜서 국물에 찍어먹을 거다. 삼겹살에 맥주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면 불향 잔뜩 꼬치에 하이볼 같은 것도 좋다.


새로운 기회라는 게 이렇게 연달아 주어진 건 오랜만이어서 신이 났다. 아드레날린이 샘솟는다는 게 이런 거였지? 내가 이렇게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이 기회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무난하고 재미없는 일상 속에서 이런 기회가 주어진 그 자체만으로도 설렜다. 그래서 잘하고 싶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셈이기도 했다. 아드레날린과 퉁치면 결과적으로 내 기분은 양(+)의 상태일 테니.


고개를 들어보니 집이 난장판이다. 침대는 싱크대 옆에 바짝 붙어있고, 여름인데 재빨리 처리하지 못한 과일 껍질에서 쿰쿰한 냄새가 난다. 딱 카메라에 잘 잡힐 만큼의 공간이 스튜디오처럼 만들어져 있다. 그래도 그동안 어째 저째 구입하기도 하고 선물 받은 것도 있는 소품과 조명, 엄마가 달아야 된다고 해서 달아둔 나비 커튼, 유튜브 한답시고 구매한 매트, 쿠팡 체험단으로 받은 마이크 같은 것들이 있어서 영상의 구도가 그럴듯하게 잡힌 게 흡족하다. 아, 색깔별로 사모은 셔츠도 좋았다. 다리미도 사두길 잘했지, 뭐야.


뇌는 이미 굿 게임을 외쳐버린 거 같기도 한데, 그래도 기분이 좋다. 모든 것에 감사하다. 이제 다시 책도 좀 읽고, 운동도 챙겨서 하고, 잠도 잘 자고, 컨디션을 정비해서 새로운 할 일을 해야겠다. 바깥이 희었다가, 까매졌다가, 다시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걸 보는 것도 오랜만에 좋았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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