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분에 적절한 메뉴
어딜 가든 한 사람이 한 시간에 1만 원 이상은 쓰는 비싸다 비싸 현대 사회인데,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도 결코 가성비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먹는 것만 놓고 본다면 말이에요. 회사생활을 하는 직딩이 요리를 해 먹는다는 건 게임과 비슷합니다. 월급 받아서 할 수 있는 재미난 일 중 하나입니다. 방탈출 게임 같기도 해요. 오늘 먹고 싶은 음식을 잘 만드는 것을 목표로 이 재료, 저 재료를 짜 맞추는 거니까요.
물론 스마트폰으로 잘 만들어진 여러 레시피를 찾아볼 수 있고, 고든램지의 레시피도, 백종원의 레시피도 따라 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이게 또 직접 해보면 그 맛이 그 맛이 아니기도 하거든요. 내가 원했던 게 이게 아닌 거 같기도 하고요. 좀 더 자극적이었어야 했나? 좀 더 좋은 음료(술...?)를 준비했어야 했나? 그러면 힌트를 실컷 받고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탈출하지 못한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듭니다. 성공적으로 방탈출을 해내려면 오늘 나의 하루가 어땠는지, 내 기분은 어땠는지 돌아보는 것부터 잘해야 합니다.
일에 치여 정신이 없었던 날에는 저녁 식사만큼은 단순하게 하고 싶습니다. 정신없이 일하고서도 보람이 없는 날도 있고, 왠지 모르게 물 흐르듯 일이 잘 흘러간 날도 있는데요. 보람이 없는 날은 왠지 힘이 없어서 ‘정화‘ 또는 ‘정돈’의 의미를 담은 식사를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싱싱한 재료를 군더더기 없이 넣은 가벼운 건강식 같은 게 좋더라고요. 정갈한 마음으로 슥슥 썰어낸 샐러드라든가, 소담하게 담아낸 밥 위에 몇 가지 재료를 순서대로 올려서 만든 덮밥 같은 걸로요.
며칠 전에 해먹은 건 귀리를 섞은 흰 밥에 아보카도, 어린잎 채소, 달걀말이, 오이를 얹은 밥이었습니다. 메뉴 이름을 굳이 짓자면, 아보카도 달걀밥 같은 거랄까요? 주인공이 둘입니다. 아보카도도 주인공이고 달걀말이도 주인공이에요. 아무래도 저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여기에는 고기라고 할 만한 게 없으니, 상호보완 해달라는 의미로 둘을 함께 넣었습니다. 그러면 고기 없이도 아주 풍부한 맛이 나거든요.
아보카도는 다들 잘 아는 대로 부드러-운 식감을 줍니다. 시장에 가서 2000원에 3개를 샀습니다. 완전히 익은 것 하나, 반 정도 익은 것 하나, 비교적 덜 익은 것 하나를 골라 왔어요. 그러면 하루 이틀 간격을 두고 하나씩 먹으면 되니까요. 아주 잘한 일 같습니다. 하나를 다 씁니다. 남은 걸 보관하면 쉽게 상하더라고요. 숲 속의 버터라더니 진짜 버터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루종일 공격적으로 일하던 사람도 가드를 내릴 만큼 부드럽게 씹힙니다. 실외에서 후숙을 시키니 적당히 따뜻하니 자극적이지 않은 맛과 식감이에요.
달걀말이는 자취를 하면서 잘 안 해 먹다가 최근에 네모진 프라이팬을 선물 받으면서 해 먹게 되었는데요. 밥그릇에 달걀 두 개를 깨서 섞은 다음, 느낌 오는 대로 소금을 휘릭휘릭 치고 팬에 참기름을 두른 뒤 달걀물을 부어서 팬의 빗면을 이용해 잘 말아주면, 별것 없이도 참 맛난 달걀말이가 완성됩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해주신 달걀 요리 중에 달걀말이를 제일 좋아했는데, 역시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은 안 난다며 감성적인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만, 제가 느끼기엔 그때 그 맛과 똑같긴 합니다.
오이도 의외로 좋은 역할을 수행해 줍니다. 아보카도의 연한 식감, 달걀말이의 포슬포슬한 식감, 어린잎채소의 소소한 보탬 사이에서 아삭아삭 씹는 맛을 제대로 주거든요. 자칫 잘못하면 너무 여리기만 한 조화를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원하는 만큼 썰어 넣어 줍니다.
어린잎채소는 음식에 쓰기가 참 좋습니다. 동네 마트에서 한 팩에 1500원을 주고 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호색을 한 벌레가 한 마리 있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쾌감을 주는 벌레는 아니어서 잠깐 으악 소리를 내질렀다가 그냥 휴지에 싸서 잘 버리고 남은 채소를 잘 씻어 곁들였습니다. 어린잎채소가 쓰기 좋다는 생각이 든 건 초록빛도 있고, 보랏빛도 있어서예요. 그리고 커다란 채소는 네모지게 썰어야 할지, 길게 썰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데, 어린잎채소는 하루 종일 짱구를 굴리다가 온 저를 배려해 주듯 써는 작업 없이도 씻기만 하면 요리에 바로 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들 아래에 베이스로 깔린 건 귀리밥인데요. 저는 귀리 1, 흰쌀 2의 비율로 섞어서 밥을 짓습니다. 오독오독 씹히는 귀리의 맛이 고소하고 좋아요. 사실 저는 온전히 귀리로 지은 밥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비주얼은 아무래도 흰쌀을 섞어주는 게 좋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도 밥이 덜 뻣뻣하기도 하고요. 그리 많은 종류의 밥을 해 먹어보진 않았지만, 흑미밥과 더불어 채소와 같이 먹을 때 잘 어우러지는 밥인 거 같아요. 그냥 흰쌀밥을 먹는 것보다는 건강을 챙기면서, 나름 비주얼도 챙길 수 있어 애용하는 밥입니다.
깜빡할 뻔했는데, 이 밥의 소스는 간장 1.5큰술이 다입니다. 아까 달걀말이를 만들 때 참기름을 둘렀기 때문에 고소한 맛도 이미 녹아 있어요. 거기에 깨가 있다면 솔솔 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음식에 묻어난 참기름의 고소함과 섬세하게 씹을 때 터지는 깨의 고소함은 또 다른 거라서요.
이렇게 먹고 나면 오늘 참 잘했네 싶습니다. 사실 저는 정신없이 일하고 돌아온 날, 맵고 거친 음식에 술 한 잔을 ‘캬’ 하고 곁들이는 것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근데 때로는 건강식을 챙겨 먹는 게 오히려 좋을 때도 있더라고요. 늘 스트레스 해소용 자극적인 음식만 드셨던 분이라면 한 번쯤 부드럽고 싱싱한 건강식을 챙겨 드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정화와 정돈의 느낌을 가져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