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다큐 '공부의 배신' 1편 후기
추석 연휴, 놀고먹고 쉬기만 하다가 하다 하다 할 게 없어서 쿠팡플레이에 뭐가 있나 보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다큐를 하나 재생했습니다. 다큐는 '공부의 배신'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이었어요. 2016년 작품이었습니다. 집중력이 꽝이라서 틀어놓고 딴짓을 하고 있었는데, 다큐가 늘 그렇듯 홀린 듯이 집중을 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린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수험생활을 떠올리게 하더라고요.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고, 제가 느낀 문제의식(?)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편의 부제는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였습니다. 영상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학생들이 셋 나옵니다.
첫 번째 학생은 손에 굳은살이 베기다 못해 상처가 나 손가락에 천을 돌돌 감고 공부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교과서를 필사하면서 내용을 통째로 외우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고 합니다. 그 학생의 말에 따르면 본인은 '익산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라 다른 학생들과 다른 엔진을 장착하고 달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두 번째 주인공은 남매였습니다. 남동생은 과학고에 다니고, 누나는 일반고에서 수시로 SKY 대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누나는 수시 시험은 잘 본 모양인데, 수능 최저를 못 맞췄는지 우울해하고, 남동생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성적이 들쑥날쑥한 점을 근거 삼아 '전략적으로' 하라는 훈계를 듣습니다.
세 번째 주인공은 일반고에 다니는, 아까 등장한 과학고에 다니는 학생보다는 내신 등급이 좋은 학생입니다. 시험을 잘 못 쳤는지 울상이에요. 꿈보다 안정적인 취업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힘든 집안 형편 때문에요. 부모님께 자식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대요.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을 중학교 때부터 했대요. 그래서 현실적인 생각들을 하는 거라고요.
공부가 중요하다 안 중요하다를 이야기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맞는 말이라는 걸 느끼고 있거든요. 여기에서 공부란 성적을 위한 공부를 의미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공부가 참 중요하고,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어쨌든 이 학생들은 공부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그 길을 선택한 친구들입니다. 그 생각을 지지하는 것을 대전제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누가 이 친구들을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학생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이들을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사실은 사회에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이 다큐조차도, 정작 당사자인 수험생들에게는 불안감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다큐에서 '정보 싸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제가 중학생 때 담임 선생님이 저한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있는데요, 요즘은 성적만 좋아서 되는 게 아니다. '엄마의 정보력과 할아버지의 재력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잖아요. '할아버지'의 재력이라뇨. 그만큼 유서 깊은(?) 탄탄한 재력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요? 담임 선생님이 좋은 분이셨고, 악의가 전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선생님을 미워하진 않았어요. 근데 문제는 그게 전반적인 분위기였고 지금은 더 그렇다는 거예요.
근데 이 정보 싸움을 누가 해야 하나요? 물론 모두가 어느 정도 알아야 하죠. 그런데 실질적으로 정보력을 갖춰야 하는 건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현 입시제도를 지적하는 게 더 근원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지만, 지금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렇습니다.
학생은 본인이 낼 수 있는 성적, 원하는 공부를 심도 있게 해서 낼 수 있는 퍼포먼스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정보는 학교에서 수집해 주고 전략은 선생님이 짜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계가 있을 순 있지만 노력해야죠. 애들이 잘해서 좋은 학교 가면 학교의 실적으로 현수막 내걸 텐데, 잘 서포트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해주지 않고서 '네가 전략적으로 못하는 게 문제'라는 둥, '이렇게 해서 서울에 있는 다른 애들을 이길 수 있겠냐'는 둥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 학생들을 불안하게 하나요. 그런 말을 해준다고 해서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좋은 말을 해줘도 알아서 불안해하는 게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인데요. 그게 안 되니 다들 고액을 지불하더라도 서울로 컨설팅을 받으러 가는 거고, 그러니 재력이 있어야 된다는, 열심히 하는 애들 힘 빠지는 소리나 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다큐에서 계속 나오는 내용이 서울과 지방의 성적 격차,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성적 간의 상관관계 같은 것들이거든요? 사회배려자 전형이라는, 무슨 뜻인지 모를 이름의 전형도 나오더라고요. 이건 여기에 해당하는 친구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구분된 기회를 주려고 하는 이상 어떤 이름일지라도 상처를 받게 되어 있을 거고 기회는 기회니까 그렇다 치고. 서울 애들이 학업 성취도가 더 높고 부모가 고소득일수록 자녀의 성적이 높다는 게 현상이라는 거잖아요(통계를 낸 것은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만). 결론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수밖에!'이긴 합니다.
다만 이게 진짜라고 가정을 하고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면, (여기서부터는 저만의 가설입니다) 저는 원동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작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나 혼자서도 불안한데, 이런 다큐에서, 뉴스에서, 학교에서, 주변 어른들이 맨날 하는 소리가 '여기는 지방이라서, 너는 부모가 서포트를 못해줘서' 뭐 이런 얘기란 말이에요. '너 일반고에서는 1등 해도 특목고 가면 하위권일걸?' 이런 얘기 주야장천 들어요.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내 부모님이 잘났어요. 부모님 주변 사람들도 잘났어요. 내 친구의 부모님도 잘났어요. 맨날 보고 듣고 자라는 게 많은 걸 누리는 삶이에요. 먹고 싶은 거 먹고, 갖고 싶은 거 갖고, 심지어는 남들이 '쟤네 부모가 의사잖아, 쟤네 부모가 사업가잖아, 교수잖아' 이렇게 말해줘요. 어린애들 눈치로도 그게 제법 좋은 거라는 걸 알겠어요. 그게 눈에 보여요. 좋은 걸 아니까 나도 해야겠어요. 그게 당연해요. 그래서 공부를 해요. 근데 그게 아닌 애들은 '내가 열심히 해야 부모님이 고생 안 해', '내가 좋은 대학을 가야 지금보다 넓은 집에서 우리 가족 화목하게 살 수 있어', '내가 괜찮은 회사에서 월급을 받아야 이 가난에서 그나마 벗어날 수 있어' 그런 생각을 할 확률이 높습니다. 선생님의 스타일마다, 가정의 분위기마다, 아이가 가진 기질마다 다를 수 있지만요.
그런 애들이 대학 가면 꿈을 찾을까요? '내가 말로만 듣던 서울 애들, 금수저 애들이 저런 애들이구나. 나는 학비를 벌려고 알바를 하고,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밤샘 공부를 하는데, 쟤네는 여유롭구나'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런 생각들을 제법 합니다. 내가 안 될 만한 이유만 주입당하면서 불안을 원동력으로 공부하는 아이와 내가 보고 듣고 자란 좋은 것들이 나에게 당연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아이의 마인드는 달라요. 지금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마인드와 지금 누리는 좋은 것을 나도 누려야지 하는 마인드에서 비롯되는 여유는 다릅니다. 그리고 가난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 현상을 관조적으로 보기 전까지는 후자의 마인드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것들 말고도 문제는 많을 거고, 더 근원적인 것도 있을 것이고, 단칼에 해결될 일도 아니지만, 저는 그냥 여기 나오는 학생들, 또는 이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수험생들에게 한 가지만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진실이 있어요.
그렇게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인내했다는 사실이, 몸이 기억하는 그 태도가, 반드시 어느 자리에서든 나를 빛나게 해 줄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저는 '그게 뭐가 어렵나, 주어진 걸 하는 건 당연한 건데' 하고 생각했었는데, 살아보니, 주변을 둘러보니 그런 태도를 아무나 가진 건 아니더라고요. 놀랍죠? 진짜입니다. 공부했다는 사실을 억울해하지 마시고,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면 됩니다. 비현실적으로 보여도, 언제가 되었든 꿈을 꼭 가지시고요. 저는 꿈도 없이 성적을 위한 공부만 했다는 사실을 후회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쓸데없이 나를 못 믿은 시간들이었던 거 같아요. 꿈은 지금부터라도 가지면 되고! 내가 노력할 줄 아는 것도 사실이고! 어떠한 성취를 이룰 때에는 분노와 불안이 내가 가진 무기들을 더 날카롭게 벼려주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니 그 마음을 나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풀어내야 합니다.
좀 짜증 나는 소식이 있는데, 공부는 평생 해야 하더라고요. 입시 성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인생 성적을 위한 공부요. 나를 계속 업데이트하기 위한 공부, 경쟁력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공부, 높은 이상을 추구하면서 느끼는 만족과 그에 대한 성취를 하면서 느끼는 행복을 위한 공부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저도 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태도가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부 안 해도 큰일 안 난다는 이야기는 굳이 안 할게요. 저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아마, 그 이야기는 도움이 안 될 테니까요. 세상이 날 힘들게 해도, 어쩌겠어요. 좋은 태도로 끝내 해내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때는 모든 어려움들이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겠어요?
너무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이야기해서 좀 그렇긴 한데, 저도 그냥 그렇게 믿고 지금부터라도 공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저도 이만 공부를 하러 가겠습니다. 파이팅!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