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 살면서 느꼈던 것들
"직주건(근)접성이 제일 중요해-"
부산에서 근무를 할 때 저와 죽이 참 잘 맞았던 부장님이 계십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부장님은 회사에서도 손꼽히는 부동산 투자의 귀재셨는데, 경제나 정치, 사회 이슈에 대해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부장님과 술자리를 하거나 외근을 갈 때에는 관련된 지식을 많이 여쭤봤지요. 부장님은 제가 부산에서 근무할 때를 기준으로 서울에 집 한 채, 현재 기준 부산 조정지역에 집 두 채를 갖고 계셨습니다. 점심을 일찍 먹고 들어온 날에는 부장님을 졸라 미니 부동산 특강을 듣곤 했습니다. 그러면 부장님은 지도 맵을 열어놓고,
"내가 말하는 게 정답은 아니야. 너희가 무조건 가서 임장도 둘러보고, 관련된 기사도 많이 읽고 해야 돼. 그냥 내 생각을 얘기해줄게. 나중에 '그때 그 시키 말 괜히 들었어!' 하면서 내 탓하지 마라."
라면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부장님은 직주근접성을 상당히 강조하셨어요. 강남이나 여의도 등 주요 업무 지구로의 접근성이 좋은 곳을 어떻게 따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지요.
"직주건접성이 중요해~"
부장님은 경남 출신이셔서 '스트레스'를 '서터레서'라고 발음하는 것이 유행이 된 것처럼 ㅡ 발음을 ㅓ로 말하는 것의 원조시거든요. 주요 업무 지구로부터 물리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곳, 다리 하나만 지나면 주요 업무 지구인 곳, 앞으로 대단지 업무 지구가 조성될 곳과 그 근처, 지하철 노선 상 주요 업무 지구에 접근하기가 괜찮은 곳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실질적으로 집값에도 강남과의 접근성이 큰 몫을 합니다. 강남 일대가 비싼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위성도시나 신도시도 강남과의 접근성이 높은 곳은 비쌉니다. GTX에 관한 발표가 나면 강남으로 이어지는 노선 위에 있는 동네에서는 철도가 완공되기 수년 전부터 집값이 들썩이지요.
이렇게 개념적으로 직주근접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그게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한 것은 지금 집에 살면서부터입니다.
회사와 집이 가까우면 가능한 일
직주근접성이라는 단어가 조선시대부터 있지는 않았겠지요. 조선시대에는 '집은 그저 남향이면 되고, 무너질 일 없고, 논밭에서 가까우면 더 좋고, 그런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일자리 때문에 사람들이 특정 도시와 지역으로 모여들고, '직장과 주거지가 가까운 게 장땡이더니다', '그 말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직주근접성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나왔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해 '좋은 집이라고 해봤자 원룸에 10평도 안 되는 월셋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의 월셋집이 미혼의 20대가 자취를 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집 중에 매우 훌륭한 편에 속하는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단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회사와 집이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회사가 가까우면 다음과 같은 일이 가능합니다.
저녁 시간의 기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집이 회사에서 가까운 저는 오후 6시에 퇴근을 하면 6시부터 자유입니다. 저는 집에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고스란히 안고 집에 돌아갑니다. 인천 이모 댁에서 회사를 다닐 때에는 6시에 몇 분 간 즐거웠다가, 지하철을 타기 5분 전부터 한숨이 나오고 2시간을 '지하 땅굴에서 뭐 하는 거냐'라고 생각하면서 기를 다 빨리고, 도착 역에서 출구로 나가면 '이제야 숨이 트이네'라고 생각하며 집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들었습니다. 물론 제 의지의 문제도 있습니다. 긴 출퇴근 시간을 활용하여 영어공부를 하는 분도 계시고, 강의를 듣는 분도 계시고, 기사를 읽으면서 시사 지식을 늘리는 분도 계시니까요. 저는 그런 의지가 없으니 차라리 의지가 발현되는 환경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은 집에 도착하면 운동을 하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책도 읽습니다. 물론 그냥 푹 퍼져서 쉬는 날, 예능을 보면서 낄낄대는 날도 많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놀거리, 먹거리가 많은 소위 핫플레이스는 대학가 또는 회사 근처에 형성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는 곳은 다 다르니, 가장 효율적인 동선이 퇴근을 한 직후 만나서 놀아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이 직장과 가까우면 약속이 있는 날에도 친구를 만나고 귀가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어듭니다.
아침 시간의 기획자도 될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여유 시간을 고려하여 집을 나서게 됩니다. 1시간 40분 거리에 살면 2시간을 잡고 집을 나서고, 30분 거리에 살면 40분 정도를 남기고 여유 있게 집을 나서지요. 환승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고, 대중교통에 사람이 많아서 내가 타고자 했던 것을 놓칠 수도 있으니 실질적인 출근 시간보다 넉넉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사에 가까이 살면, 특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살면 변수는 횡단보도 신호가 잘 걸리느냐 아니냐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매일 시간의 편차가 거의 없게 출근을 할 수 있습니다.
출퇴근 시간이 줄어드니 잠을 좀 더 많이 잘 수도 있고,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거나 아침을 해먹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앞의 두 가지 요소로 인해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시간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잘 활용할 수 있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지옥철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지옥철에서 사람들과 억지로 부대끼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쾌함이 줄어듭니다. 출근도 하기 전에 에너지를 빼앗기거나 집에 돌아가면 녹초가 되어 있는 일도 줄어듭니다. 최근에 퇴근을 하고 멀리까지 가야 할 일이 한 번 있었는데, '그래, 그동안 내가 이걸 잊고 살았구나.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하게 된 것은 축복이구나', '월셋집을 나가면 회사에서 1시간 30분 걸리는 자가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가로 들어가면 더 열심히 살면서 점점 회사와 집의 거리을 줄여나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야근을 해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야근을 좋아하지도 않고, 팀장님께서도 야근을 하는 걸 권하지 않으시지만 일을 하다 보면 야근을 할 일이 종종 생깁니다. 저녁 이후에 좀 더 회사에 매여 있을 일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래도 부담이 덜합니다. '집이 코 앞인데, 뭐'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약간은 신나기도 합니다. 집이 가깝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 자체로 좋기도 합니다.
'아, 이래서 직주근접성이 높은 집이 비싸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로 인해 새롭게 도래한 사회에서는 집에 대한 가치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주근접성이 높은 집이 여전히 비싸도, 싸져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직주근접성이 높은 집이 비싸면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일 것이고, 재택근무의 활성화로 인해 직주근접성이 높은 집이 크게 자산 측면에서의 가치가 없어져도 다양한 형태의 집이 나오고 개인과 가족의 삶의 수준을 올려주는 집이 각광받는 것일 테니까요.
결론은 회사와 가까운 집, 대만족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