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맛

고정순 글, 그림《옥춘당》

by 그림북오름


그림책을 봐온 지는 이제 햇수로 11년째인 거 같다. 아이가 태어난 해부터 의무적으로 보아왔으니 10여 년이 된다. 아이만을 위한 그림책이 아닌 함께 보는 그림책으로 본격적으로 본 건 아이 2학년 때부터이니 이제 3년째 된다. 그때그때 책만 쓰윽 읽고 잊어버리기 일쑤이니 아까운 마음에 짧게라도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스타그램 "그림북오름" 처음엔 그냥 한 줄 감상 정도 남겼는데 2년이 좀 넘은 계정 피드에는 주저리주저리 쓸 말이 많아졌다. 사실 그 자리도 모자라 지금 브런치에 글을 남기고 있다. 인스타엔 책을 보며 아이와 함께 나눴던 이야기와 더불어 서평 비슷한 일기를 올린다. 그곳에는 뭔가 책 소개글 같이 되어버려 존대를 하며 올리고 있는데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뭔가 제약이 생기는 듯했다. 그래서 좀 더 자유롭게 쓰고 싶어 지면이 훨씬 넓은 이곳에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브런치에 기록 할 첫 번째 책으로《옥춘당》을 골랐다.



지난달 우연히《옥춘당》발간 기념으로 출판사에서 진행한 고정순 작가님의 라이브 방송을 보았다. 사실 작가님의 다른 책을 많이 보지는 못했다. 필모를 찾아보니 한 두 권 정도는 본 기억이 있지만 작가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방송을 보면서 작가님 말씀하시는 게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담담하면서도 묵직한데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말투였다. 그런 목소리와 말투로 일상에 관한 이야기, 책과 관련한 에피소드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예고하신 대로 중간중간 울컥하시고 눈물도 보이시고... 라이브 방송을 보고 나서 곧바로 책을 주문했다. 책을 받고 나서 오랜 시간동안 책 읽기를 주저했다. 라이브 방송을 통해 줄거리도 알았고 군데군데 작가님이 쓰신 글도 소개되어 미리 보아서인지 첫 페이지를 열기가 쉽지 않았다.


가끔 책을 펼치기가 어려운 책들을 만난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혹은 마주하기 불편한 이야기들이 담긴 책들. 《옥춘당》은 보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져 그 기분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림책 한 권 보면서 뭘 그리 망설일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책들이 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곁에만 두다가 설이 지나고 연휴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후 봐야지 했다. 옅은 스케치로 꼭 잡은 두 손과 동그라미 안에 옥춘당이 그려진 초록색 제목이 예쁜 표지이다. 그림책 치고는 페이지수가 꽤 되는 만화형식으로 되어 있다. 출판사에서 만화 형식으로 사탕에 관한 책을 기획해 만든 책이라고 한다. 작가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며 작가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 책 속 할아버지가 불러주신 만화영화 주제곡이나 할아버지 댁의 배경을 보니 나의 어린 시절도 떠올랐다.


나는 여름이 고여 있던 그 집을 오래 기억한다

작가님은 할아버지 댁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나에게도 작가님처럼 가을이 가득했던 외갓집이 있었다. 지금은 폐가가 되어 버린 외갓집. 외갓집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 기억 중 가장 또렷이 남아 있는 기억이다. 지금도 떠올리면 사진을 찍어 낸 듯 선명한 그 곳. 외할아버지 방에서 작은 마당을 향한 문을 열면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가을엔 그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낙엽이 정말 와르르 떨어져 소복이 쌓였었다. 방문 앞에서 문을 활짝 열고 팔을 괴고 누워 떨어지는 낙엽을 멍하니 한참 바라보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무와 나뭇잎, 하늘만을 눈에 담을 수 있는 편안한 가을의 시간이었다.


책 속의 할아버지 고자동씨는 살갑고 다정하신 할아버지인 반면 우리 외할아버지는 조용히 다정하신 분이셨다. 말씀은 거의 없으셨지만 잘 익은 감을 손주들을 위해 묵묵히 따서 건네주시던 분이셨다. 우연이지만 책에서와 같이 외할아버지는 폐암으로 외할머니는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다. 친손주들만 은근히 편애하시며 잔소리가 많으셨던 외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시고 나서는 가끔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외할머니가 그렇게 웃으시는 모습을 건강하셨을 땐 거의 본 적이 없다.



이 책을 통해서야 이름을 알게 된 옥춘당도 외갓집에서 처음 먹어 보았다. 그렇게 오래 보았던 사탕이었는데 이름이 따로 있는 줄은 몰랐었다. 기독교였던 친가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유교적 전통을 중요시했던 외가에서는 제사도 지내고 장례도 옛날 방식으로 치루고 했으니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올라가는 옥춘당을 맛본 것도 외갓집에서였다. 달달구리를 지금보다 더 좋아했던 어린 시절, 저 알록달록 커다란 사탕을 입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 먹으면 세상 행복하겠다 생각했었다. 정작 먹다 보면 중간중간 날카로운 구멍이 생겨 혀에 작은 상처가 나기도 하고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특색 없는 사탕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옥춘당은 보기만 해도 입에 넣고 싶어지는 탐스런 사탕이다.



아들은 책 속 김순임 할머니가 요양원에서 그린 동그라미가 옥춘당이냐고 물었다. 옥춘당을 그리셨을까? 할아버지의 얼굴을 그리려다 마신 걸까? 아니면 동글동글 돌아가는 인생을 그리신 걸까?

질문과 함께 아들은 이런 감상을 얘기해주었다. "엄마, 할머니에게 단 하나뿐인 친구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보면서 엄마 아빠 생각을 했어요. 엄마 아빠도 둘이 친구잖아요. 엄마 아빠 중 한 분이 먼저 떠나면 남은 한 분이 너무 슬플 거 같아요... 근데요 책 마지막을 보면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기다리셨다 두 분이 함께 날아갔어요. 그걸 보니 이 책은 꼭 슬픈 책 같지만은 않아요." 그런 아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지만 슬퍼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 어색한 웃음 짓고 있었다.



책 표지 위쪽 한켠에 '사탕의 맛'이라고 쓰여 있다. '사탕의 맛' 시리즈엔 각양각색의 달콤한 사탕 이야기들이 있겠지. 처음 책을 받고 '사탕의 맛'을 '사랑의 맛'이라고 잘 못 봤었다. 책을 보고 나니 내가 잘 못 본 게 아니었다. 책 속 순임씨가 좋아하던 옥춘당은 알록달록 커다란 사랑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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