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스무 살을 넘기고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나는 딱 3개월만 월급을 몽땅, 한 푼도 남김없이 써보리라 맘먹었었다.
대학 다니는 내내 돈이 없어 굶주렸고 사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지하철 역에서 찹쌀떡 팔기, 새벽 시간 자동차 유리에 대출 명함 꽂기, 포장마차 야간 서빙 등 다양한 알바를 해가며 용돈을 모아서 사용해야 했기에 정말 딱 3개월 만은 돈 걱정 없이 펑펑 써보고 싶었다.
"엄마, 한 달에 얼마씩 적금 부어야 할까요?"
마음먹었던 3개월이 지나고 내가 물었다. '원 없이' 써보기엔 너무 적은 돈이었지만 그전까지의 내 씀씀이를 생각한다면 이만하면 만족스러웠다. 이제 돈을 모으기로 했다.
엄마는 농협에 가서 월 50만 원짜리 적금을 들라고 하셨다.
"50만 원이요?"
되물음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지만 나는 '네'라고 답하고 말았다. 엄마는 아셨을까. 그때 내 월급이 고작 월 78만 원이었다는 걸. 딸이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하니까 당연히 월 100만 원 이상은 받을 줄 아셨을 테다. 반문을 하자니 그런 속사정을 말해야 하는데 부모님인데도 참...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냥 월 50만 원씩 적금을 하자고 맘먹었다.원래도 용돈은 적었기에 새삼 아껴 쓸 필요도 없었다.
다행히 큰언니와 작은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지방 출신 미혼여성을 위한 아파트에서 살게 돼 주거비는 크게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방을 같이 써야 한다는 것, 성인임에도 귀가 시간이 정해져 있고 일요일이면 정해진 시간에 다 같이 청소를 해야 한다는 규칙들이 불편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그렇게 5년짜리를 했더니 3천만 원 목돈이 생겼다. 생애 처음으로 만져본 큰돈이었다. 솔직히 적금을 처음 들고는 힘들었었다. 3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점심도 먹어야 했고, 버스도 타야 했다. 속 모르는 친구들은 취직했다고 밥과 술을 사라고 했다. 그렇지만 버텼다. 그리고 끝내 적금 만기를 이뤄냈다.
그리고 나는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적금뿐이라고 단정 지어버렸다. 계속해서 모았고, 적금을 했다. 대학원에 다닐 때 지인의 추천으로 한 학기 휴학하면서 그 등록비를 주식에 넣어두었던 적이 있다. 매일같이 날개단 듯 치솟았다. 나는 주식에 대해 1도 몰랐고, 적금처럼 일정 기간 넣어두면 될 거라 생각했다. 대학원에 복학할 때 다시 꺼내본 주식 잔고는 반토막도 아니고 정확히 1/3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부산에 출장 가면 멀리서도 보이는 조선 관련주였다)
이러한 경험으로 다시금 적금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이런 내 생각에 브레이크가 걸리게 되었다. 입사 20년 만에 육아휴직을 하게 된 것이다. 가족들과 충분히 상의했고, 나름 이렇게 저렇게 해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때쯤 내 머릿속은 계속해서 계산기를 두드려 대고 있었다.
"이번엔 휴직이지만, 퇴직 후엔 어쩌지?"
육아휴직이라 기본급을 받음에도, 이때까지 받았던 금액보다 적어지니 셈이 복잡했다. 그러면서 점점 적금을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퇴직하면 적금할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게 그 고민이었다.
"자발적으로 돌아가는 경제 구조를 만들어야 해."
그쯤에 나를 사로잡는 고민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와 강남역에서 얼굴을 보기로 했다.
강남역 느린 마을 막걸리 집.
코로나가 시작되는 시국인 데다 추운 겨울이라 가게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막걸리와 골뱅이무침을 주문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음에도 이렇게 따로 보는 건 처음이라 어색할 줄 알았던 언니와의 대화는, 재미있다가 심각했다가 하며 긴긴 시간 단 1분도 허투루 흐르지 않았다.
이날 우리의 대화 주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
어떻게 돈을 모을 것인가.
나는 스스로를 '아날로그적 인간'이라 부르며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화하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했고, 싫어했다. 그런데 막상 고민이 생기고, 그것에 대해 함께 얘기할 사람이 생기자 자꾸 내 생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래서이날의 만남을 '막걸리 회동'이라 부르며 나를 변화시킨 날이라고 여긴다. 그만큼 40여 년 간 꽉 잡고 있던 생각에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 날이라는 의미!
(이미지 출처) Pixabay
"엄마는 회사 다니는 게 좋아?"
얼마 전, 큰 애와 카페에 있을 때 큰 애가 나에게 한 질문이다. 아마도 집에 있으면서 학교 다녀오는 아이들을 맞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질문이었을 테다. 그때 맞은편에 놓인 키오스크 앞에서 헤매는 한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일행은 결국 키오스크가 아닌 점원에게 주문한 후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엄마도 때로는 회사에 가기 싫은 날이 있지. 그래도 가기 싫다고 안 가고, 가고 싶다고 갈 수는 없잖아.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다니는 건 맞지만 엄마가 회사에 다니면서 느끼는 건 자꾸 변화하는 세상을 배워간다는 것도 있어. 나중에 너희들이랑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라도."
과연 그렇다.
언니로 인해 경제 공부를 하면서, 무엇보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메타버스, 제페토, 많은 기업들의 이름들... 이런 세상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다고 여겼지만, 어느새 애들이 그것을 하고 있거나 하려고 하는 것들이다.
내가 내내 관심 없는 척 등 돌리고 있었다면, 점점 커가는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키오스크를 사용하는 게 전혀 어색하거나 어렵지 않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아이들이 일상으로 사용하는 어떤 도구나 사이트에 대해 나는 무지하거나 어렵게 되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