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Kwon의 브런치북 <어떤 날의 단상>

삶은 화려한 경험이 아닌 소소한 순간이 빚어내는 것이라 믿는 당신에게

by 이진민

브런치에 작은 집을 지어 글을 쓰고 타인의 글을 맛보러 다닌 시간을 세어 보니 스무 달이 되었다. 꼭 책을 내지 않았어도 모두가 작가라 불리는 이 곳에는 참 다양한 맛의 글들이 있었다. 달고 시고 고소하고 매콤하고 쌉싸름한 글들, 푹 익은 글들과 갓 베어낸 풀 같은 글들이 세상 여기저기에 돋아나 있었다. 놀라운 문장들이 내 눈으로 펄떡이며 뛰어들 때도 있었고, 다양한 온도를 가진 이야기들이 화선지 위 먹물처럼 내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 때도 있었다.

좋아하는 글들이 많았다. 마음의 눈은 대체로 시력이 비슷한지, 스무 달을 지나다 보니 그런 글들은 예외 없이 책으로 묶여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책으로 나올만한 매력적인 글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예외 없이 그렇게 눈 밝은 출판사들이 캐내어 갔다. 글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껴지면 이미 책을 써낸 분들인 경우도 많았다. 오래 글을 보아왔고 글이 참 좋은데, 글을 읽을 때마다 그냥 참 좋은데 아직 출간 소식이 들리지 않는 내 마음속 작가님은 두 분. 그중 하나가 RayKwon 작가님이다. ‘그녀’가 어떻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적은 짧은 글 한 편에 바로 매력을 느꼈고, 온실 속에서 작은 결혼식을 여는 글을 읽으며 나도 축복의 마음을 빵처럼 부풀린 하객이 되었다. 



책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각각의 글들은 자체로 좋은데 브런치북으로 통일성 있게 엮어내는 기술에 약간 아쉬움이 들기는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장하는데 서툰 사람들이 있다. 개인적으론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특성이지만 아무래도 경쟁 같은 단어와는 합이 맞지 않겠지. 하지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떠오른다. 애써 내려 본 결론은 아마도 크게 특별할 것이 없어서, 아마도 그래서가 아닐까. 책이란 건 사람을 매혹시키는 이야기이거나, 특별한 주제가 있거나, 깨달음이나 정보를 주거나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그녀의 글은 평범하고 소소한 삶의 조각이자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기 때문에. 친구가 전화로 한숨 쉬며 들려주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사촌 언니와 함께 떠올리는 어릴 적 기억 같기도 하고, 옆집 부부가 놀러 와서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이야기들. 안개꽃 같고 밥 같은 이야기들. 밥만 주문하거나 안개꽃만을 사가는 일은 드물기에, 그래서 아마 나오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래서 그녀의 글이 참 좋았다. 삶이란 사실 이런 것이다. 특별한 주제나 깨달음 같은 것 없이도 잔잔하고 소소하게, 때로는 시시하게 흘러가는 것. 화려한 글, 과도하게 따뜻한 글, 강박적인 해피엔딩,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며 선언하는 글들 속에서 RayKwon 작가의 글은 그녀가 올린 작은 결혼식처럼 작고 소박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소소해서 좋고, 애써 그럴듯한 결론을 붙이지 않아서 더 좋다. 이야기들은 따뜻한 두부처럼 부담스럽지 않게 읽힌다.

그렇게 두부 같고 안개꽃 같은 이야기들이 들어있는 브런치 북 <어떤 날의 단상>. 이런 소개글이 붙어있다.

“마음의 틈으로 바람이 부는 날. 평범한 일상의 기억과 감정의 조각을 이어 짤막한 글을 짓습니다. 우리의 삶은 화려한 경험이 아닌 소소한 순간이 빚어내는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의 삶은 화려한 경험이 아닌 소소한 순간이 빚어내는 것이라 믿는 사람은 이런 글을 쓰는구나 싶다. 실제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들은 대체로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별 관심을 두지 않은 현재들, 근사한 걸 잡고 싶어 움켜쥐어 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하찮은 모래알 같은 것들. 돌아보면 이런 것이 모이고 쌓여 인생이 된다. 이를테면 아빠와 나눈 맹숭맹숭한 대화, 애써 마음먹고 갔는데 문을 닫은 가게, 한참이나 풀지 못한 마음속 앙금 같은 것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모든 게 잘 굴러가지 않아도, 삶은 그렇게 소소하고 시시하고 따뜻한 그 모습 자체만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분들께 RayKwon님의 이 브런치북을 읽어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글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글이 시시하고 맹숭맹숭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 두어도 좋다. 그녀의 글은 유난히 행간이 깊고 곱다. 때로는 아무런 결론 없이 그렇게 글의 문을 닫지 않고 슬쩍 열어두기도 한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포장하지 않고 가만히 둔다. 창문이 열린 방 같은 글들이라고 하면 좋을까. 창틀엔 고운 먼지가 내려앉아 있고 해가 내내 잘 들진 않아도 하루에 한 번은 들러 온기를 주고 가는 그런 방. 그 작은 방의 주인은 차분한 톤으로 말을 건네며 소소한 웃음과 먹먹한 여운을 준다. 창문이 열린 방이라 밖과의 교감이 더 생생하고 화려하지 않은 방이라 누구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각각의 글은 짧은 편이다. 사실 책으로 엮기에는 어정쩡했을지도 모를 길이의 글은 그래서 오히려 듣는 글, 라디오라는 매체와 무척 잘 어울릴 듯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과 어쩐지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이 느껴지는 문장들에서 한때 방송작가로 글밥을 먹었다는 그녀의 내공이 엿보인다. 특히 한 글 안에서 시공간을 오가는 장면의 전환이 굉장히 감각적이다. 중간중간 음악이 들어가서 읽힌다고 상상해보면, 이처럼 라디오의 특성에 걸맞은 브런치북이 따로 없다.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한 촌스러운 애틋함으로 시작해서 어머니에 대한 맹숭맹숭한 먹먹함으로 마무리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맑은 질문으로 끝이 난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일, 주변의 힘없고 나이 든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예기치 않았던 타인의 감정과 만나는 일 같은 것에 대한 담백한 단상이 들어있다. 오래 묵혀뒀던 감정을 천천히 풀어 사과를 하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대신 따듯한 추억을 쌓고, 익숙함이 사라진 풍경에 대해 생각하고,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방인과 현지인이라는 구분을 곱씹고. 그러다 보면 내 삶과 주변 인물들이 새삼스레 다정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문제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담백하게 마주할 힘이 생긴다.

실은 브런치 라디오에의 소개 여부보다는 그냥 사람들에게 이 작가의 글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영원한 듀오, 뽕짝과 외삼촌, 물이 마음을 달래는 시간. 브런치북 전체가 부담스럽다면 앞부분의 이 세 글만 읽어도 따뜻한 두부의 맛과 고운 안개꽃의 소박함이 느껴지리라 믿는다. (실은 <반나절 느림>이라는 매거진에 실린 글들을 가장 좋아하는데 아쉽게도 아직 브런치북으로 엮지 않으셨다.) 화려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 담백한 글들이 자기에게 어울리는 접시, 어울리는 화병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raykwon1


p.s. 이 글을 발행해도 좋을까 싶어 작가님께 미리 문의를 드렸다. 실은 걱정이 많았다. 내가 뭐라고, 말 한 마디 나눠보지 않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귀한 글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글을 쓰면서 가장 걱정이 많았던 부분 - 책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 - 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하고 동의해 주셨다. 어찌나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던지.


“책 한 권의 물성보다는 조금 가벼운, 이를 테면 커피를 마시며 생기는 잠깐의 틈이나 따뜻한 이불속에서 나른한 기운을 즐길 때 읽기 편한 글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작가님의 글을 읽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며 생기는 잠깐의 틈, 혹은 따뜻한 이불속의 나른한 기운에서라면 역시 브런치 라디오로 듣는 것도 썩 잘 어울리지 않을까.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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