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가 머리를 아래로 향하지 않고 단재 신채호 선생마냥 꼿꼿이 세우고 있었던 까닭에 첫 아이를 수술해서 낳았다. 실은 내가 그랬다고 한다. 아무리 체조를 해도 고집스럽게 자세가 바뀌지 않아, 죄송스럽게 엄마 몸에 칼을 대게 해서 나온 딸이 나다.
의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인 엄마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서 태아가 돌 공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내 경우, 첫 아이가 나오기 한 달 전에 박사 논문 디펜스를 하고 학위를 땄기 때문에 부른 배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이 많았다. 나와 남편은 유학 중에 만났고 첫 아이가 태어난 해에 내가, 둘째 아이가 태어난 해에는 남편이 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났다. (첫 아이의 신분증을 받아 그 안에 눈망울이 똘망한 독수리를 보았을 때 엄청난 위화감이 들었다. 허, 내 새끼가 미국 놈이라니.)
"Welcome to the World" cards from the White House and Disney. 오바마 때 둘을 낳아치워 다행이다 ⓒ a little teapot
둘째를 낳을 때는 첫 아이를 돌보며 백수로 있었던 탓인지 (허허허) 아이가 진작부터 올바른 자세로 들어 있었다. 자연분만을 시도할지, 아주 적은 확률이지만 자궁파열의 위험이 있으니 그냥 수술로 갈지 선택을 해야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이름조차 경험적으로 맛있어 보인다)을 따라 온갖 종류의 경험을 조용히 환영하는 경험주의자인 나는, 사실 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아보고 싶었다. 이왕 세상에 태어났는데 여자들만 할 수 있는출산을 경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곰이랑 비슷하게 생겼으니 곰 같은 힘을 낼 것도 같았다. 하지만 산후조리를 몇 주씩 해 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기에 다시금 수술을 택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먼 나라에서 열흘 정도 와 주는 언니의 시간을 최대한 고맙게 활용하려면 아기는 정해진 시간에 나와주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먼 길을 와 준 언니의 캐리어를 열어보니 이러했다.
언니가 내 산후조리를 하겠다고 챙겨 온 가방. 아름답다. ⓒ a little teapot
Life is C between B and D
수술 날짜가 정해졌다.
광복절 다음날이었다.
아기도 만세를 부르며 나로부터 독립을 할 모양이었다.
하루 전날 병원에 가서 피도 뽑고 다음 날 있을 수술에 필요한 절차를 진행시키는데, 의료진과 앉아 서류를 작성하고 이런저런 질문에 답하는 와중에 나에게 living will(유언장)이나 attorney(지정 변호사)가 있는지 묻는 질문이 훅 들어왔다.
아, 내가 이 생명을 탄생시키다가 죽을 수도 있지 참.
같은 병원에서 두 번째 출산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질문의 무게감이 좀 다르게 느껴졌다.
그렇지. 병원은 늘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곳이었다.
“Life is C between B and D.”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한 말이라는데, 어느 책인지 정확한 출처는 모르겠다(이 세상 박사들은 항상 직업병처럼 출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마땅한 직업도 없는데 직업병이라니 망할).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한 이력이 있을 만큼 워낙 소설과 희곡도 많이 썼던 작가이기도 하니, 철학서가 아닌 문학작품이나 인터뷰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인생은 삶(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무수한 선택(Choice)이며 그 선택이 오늘의 우리를 만든단 의미라면 사르트르의 철학과 맥이 잘 닿는 말이다.
출처도 모르면서 이미지를 한 번 만들어 보았어요. ⓒ a little teapot
사실 임산부와 태아의 생명권 문제는 정의(Justice) 개념을 논할 때 늘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였다.
“태아의 생명이 엄마의 질환으로 인해 위독하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겠나?”
상상할 수 있는 각종 산부인과의 비극적 의료사고들을 줄줄이 나열하며 인자한 매 같은 (인자한 매를 본 적은 없지만 그 교수님의 눈빛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매같이 날카롭고, 그리고 인자했다.) 눈빛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던 Abramson 교수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자기 삶을 마감하면서 아이의 목숨을 살린,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을 만큼 용감한 산모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그간 배운대로 이 문제를 늘 정의의 개념과 밀착시켜 생각해 왔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정의의 개념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삶의 문제, 생존의 문제였다.
그랬다.
내게는 출산이 “C between B and D”였다.
감사하게도 나도 아이도 건강했기에, 여기에서의 C는 선택(Choice)의 C가 아니라 기회(Chance)의 C다. 출산은 내가 삶과 죽음이 맞붙어 있음을 처음 제대로 느꼈던 ‘기회’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죽음을 제대로 느꼈다.
마치 죽비로 탁, 하고 어깨를 맞은 것처럼.
내가 한 생명을 시작시킬 수 있지만, 나의 생명이 다할 수도 있구나.
그렇게 꼬물거리는 새 생명의 탄생을 앞두고, 나는 처음으로 나의 죽음과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인사를 나눴다.
새 생명을 품은 순간부터 나는 ‘삶’과 ‘생명’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것 같다. 임신이라는 것은 한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지, 한 생명의 죽음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내 뒤 어딘가에 죽음이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 녀석은 한 2만 킬로미터쯤 뒤에서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오는 존재감 없는 녀석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죽음을 만나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모두가 타인의 죽음이었지 나의 죽음을 내 눈으로 빤히 바라본 적은 없었다.
곧 한 생명을 낳아 엄마가 되려는 시점. 나는 엄마가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바라보고 그 무게를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생의 근본적인 기분을 불안이라고 했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사람이 언젠가 죽을 것을 알지 못한다면 살아가는 것을 실감할 일도 없다고 했다.
삶이 없다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다면 삶의 정수란 없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할 때 삶에 대한 가장 강렬한 느낌을 얻는다. 부른 배를 하고 그렇게 니체(Friedrich Nietzsche)와 하이데거와 악수하는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님들 말씀이 제 배에 와 닿네요. ⓒ a little teapot
내 손에 맡겨진 생명들
죽음이라는 단어가 하루 종일 내 뇌 안에 뒷배경으로 플래카드처럼 걸려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지거나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집을 며칠 떠날 때 곰국 한 솥을 끓인다지만 나는 곰국 대신 오븐을 켜고 대대적 베이킹을 시작했다. 더운 여름에 비교적 오래가는 먹거리, 언니와 남편과 아이가 오며 가며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아이템을 생각하자니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콩가루를 넣어 고소한 식빵을 굽고, 남편이 좋아하는 스콘 반죽을 만들고, 아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머핀을 만들어 반을 냉동해 두었다.
빵은 맛있게 먹으면 빵 칼로리 ⓒ a little teapot
남편은 아무거나 잘 먹고 요리도 잘 하고 소식하는 편이라 알아서 하겠지만, 아무거나 먹을 수 없는 두 살짜리 아이가 걱정이었다. 사실 걱정할 일은 아니었는데, 그간 아이의 먹거리는 전적으로 내가 담당해 왔었기 때문에 살짝 걱정이 생겼던 것 같다. (이래서 아빠들도 평소에 이유식 만들기, 아이 반찬 만들기의 경험치가 필요하다.) 아이가 잘 먹는 볶음밥을 넉넉히 마련하고, 아이가 좋아해서 이것만으로도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달큰한 무나물을 짭조름하게 볶았다. 자기가 직접 발판을 가져와서 냉장고 문을 열고 조그만 손을 뻗는 곳에는 간식으로 좋아라 먹는 복숭아 맛 망고 맛 요거트도 많이 사 두었다.
그러고 보니 내 손에 맡겨진 생명들이 걱정됐다.
내가 없어지면 생존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는 생명체들.
내 어린아이와 내가 키우던 식물들.
삐약거리며 뛰어다니는 첫째 녀석이야 남편과 언니가 챙겨줄 테지만,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 집안 곳곳의 말 못하는 생명들에게까지 남편이 신경을 써줄지 걱정이 됐다.
모든 화분에 물을 충분히 주고, 남편에게 어떤 화분에 어떻게 물을 줘야 하는지 알려주는 쪽지를 썼다.
평소에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죽음이라는 플래카드가 하루 종일 뇌 안에 휘날리고 있었던 탓인지 생명이라는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거구나 싶었다.
내가 없더라도 부디 잘 살아남아 주렴.
독일로 이사 오기 전, 마음씨 좋아 보이는 이웃에게 입양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얘들아, 그곳에서 행복하니. ⓒ a little teapot
최후의 식사
수술을 앞두고 금식을 해야 했다.
오전 6시까지 간단한 아침을 먹으라는 지침. 그 이후에는 물도 한 모금 허락되지 않았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간단히 씻고서 냉장고를 열었다. 부엌에는 아이를 맞기 위해 지난 밤 남편이 개미처럼 집에 날라온 먹이들과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최후의 만찬을 고르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선택한 내 최후의 조찬은 두유에 시리얼 한 주먹, 어제 먹다 남긴 블루베리 머핀 반쪽, 체리 한 알과 달콤한 한국 포도 세 알이었다.
먹고 나니 아쉬웠다. 시계는 아직 5시 52분. 남편이 특별히 한국 마트까지 가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바리바리 사들고 온 반찬들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무말랭이를 두 개 집어 먹고 곶감을 한 개 입에 물었다. 5시 58분. 시원한 보리차 한 잔으로 마감하니 왠지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둘째 아이를 맞기 전날 남편이 개미처럼 집에 날라온 먹이들과 꽃다발. 지금 독일에서 보니 부럽다. 차를 타고 나가서 전과 각종 반찬들, 한국 포도를 사 올 수 있었다니.
이렇게 먹고 있자니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신청한다는 최후의 식사가 떠올랐다. 정말 앞으로 아무것도 못 먹게 된다면 뭘 골라야 할까. 사형수들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최후의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일까.
제임스 레이놀즈, '최후의 만찬' ⓒ James Reynolds
*영국 사진작가 제임스 레이놀즈(James Reynolds)가 미국 감옥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최후의 만찬(Last Suppers)'.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이 원하는 마지막 식사를 먹을 수 있도록 하는데, 주문 받은 그 메뉴들을 재구성해 찍은 것이다. 죄수복 색깔과 같은 오렌지색 식판들을 보며사형 제도의 존치 필요성에서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정말이지 메뉴가 천차만별이라는 것이었다.
사회과학에서는 합리적 선택을 하는 인간들을 가정하고, 그들의 행통패턴을 파악해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게임 이론인 '죄수의 딜레마'만 보더라도 자신의 이익에 가장 도움되는 선택을 하는 합리적 행위자를 가정한다.서로의 결정을 알 수 없게 각방에 가둬진 죄수들은, 협력(침묵)하는 쪽이 서로에게 이익이지만 언제나 배신(자백)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때문에 아주 줄줄이 배신이 이어진다는 게 죄수의 딜레마다.
하지만 인간이란 사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하나로 묶이지 않는 법이다.
죽을 만큼 위협적인 고문에도 입을 굳게 닫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단지 죽을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기 때문에 그 자유를 과시하고자 죽음을 택하는 인간들도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의 소설 <지하 생활자의 수기(Notes from Underground)>에는 후자의 인간형이 잘 드러나 있다. "자기에게 해롭고 바보 같은 짓도 일부러 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늘 합리적이고 타당한 목표만 가져야 한다는 의무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 가장 멍청한 짓을 할 권리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 내면의 비합리적 본성과 광기를 생각한다면, 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런 인간들을 무슨 수로 하나로 묶어 가정하겠는가.
따라서 어떤 가정도 예측도 쉽지 않다. 죽기 직전에는 누구나 상다리가 부러지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을 것 같지만, 사진으로 확인한 메뉴들은 내 예상을 가뿐히 뛰어 넘었다. 크래커 한 조각에 콜라 여섯 병, 혹은 아이스크림 콘 네 개. 심지어 허망하게 올리브 한 점을 요구하거나 식사 대신 그저 성냥과 담배를 선택한사람도 있다는 사실.
예측 불가능한 인간 존재의 특성이 식판들 위에 너무도 잘 드러나 있다.
삶에 대해 만족하는 편이었고, 늘 죽는 것에 대한 미련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삶에 대한 미련이 갑자기 풍선처럼 후욱 불어났다.
내 어머니가 적지 않은 나이에 나를 낳으셨다.
나는 엄마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아이들을 낳았다.
나이에 초연하게 살아왔는데, 아이가 생기니 자꾸 나이 계산을 하게 된다.(... 하지만 숫자가 제2외국어인 인간이라 계산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왠지 마음이 든든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엄마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종교로도 채워지지 않는, 엄마만의 자리.
세상과 처음 만나는 연결고리이자, 내가 이 세상에서 따끈한 밥을 공짜로 얻어먹어도 마음 편할 유일한 사람. 엄마.
아이에게 엄마의 자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종종 필요할 텐데, 내가 잘 버티어 줄 수 있을까.
뭐, 일단은 수술을 잘 버티는 것부터.
그렇게 나는 내 손에 맡겨진 생명들과 잠시 이별을 하고 또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