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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ul 12. 2022

어쩌자고

스물아홉 번째 시

2022. 1. 6

진은영, ‘어쩌자고'
진은영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중에서


[어쩌자고]


밤은 타로 카드 뒷장처럼 겹겹이 펼쳐지는지. 물위에 달리아 꽃잎들 맴도는지. 어쩌자고 벽이 열려 있는데 문에 자꾸 부딪히는지. 사과파이의 뜨거운 시럽이 흐르는지, 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지. 유리공장에서 한 번도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부서지는지. 어쩌자고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는지.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 검은 버찌나무 위의 가을로 날아가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어쩌자고 이렇게 줄도 반듯하게 못 맞추는지


물결 같은 삶 속에서 촉촉이 젖은 채, 있는 대로 찰랑거리는 것 같은 시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어쩌자고 밤이 있는지, 어쩌자고 세상엔 꽃이 있고 그 꽃은 지는지, 어쩌자고 새가 우는지.

 

밤이 타로 카드 뒷장처럼 겹겹이 펼쳐진다는 표현이 좋았어요. 아침이 되면  장씩 뒤집어   있는 걸까요. 따지고 보면 매일매일이란 것은 신이 나눠주신, 아직 뒤집어 보지 않은 카드 같은 거죠. 달리아는 주로 정원에 원예용으로 심는 꽃이라 자연스레 물가에 피지는 않을 텐데,  꽃잎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위를 뒹굴고 있는 건지 뒷이야기가 궁금했어요. 벽이 열려 있는데 문에 자꾸 부딪힌다는 표현은 역설과 중의가  깊어서 문장을 꼭꼭 씹었고요.  번도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부서진다는 표현은 괜히 슬펐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보지 못하고 스러작고 투명한 생명들의 이미지가 겹쳐서요.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사과파이의 뜨거운 시럽의 감촉, 종이를 태운 재들의 부드러운 감촉을 두고는 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렸습니다.  시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한없는 상상이 가능해서 좋아요.  


쉼표로 잇고 마침표로 끊어 가던 시가 마지막에는 연이어 쉼표를 쓰며 숨찬 듯이 내달리다가 부호 없이 열린 채로 끝나는 것도, ‘어쩌자고’의 여운이 무한히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그 어쩌자고-의 공이 이제 나에게로 넘어온 느낌.


어쩌자고.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 단어 아닌가요.

네 음절 안에 엄청난 삶의 조각이 꼭꼭 들어찬 느낌.

손쓸 틈 없이 진행되어 버린 무언가를 쳐다보면서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 같은 단어.


저는 이런 단어들이 좋아요.

굳이, 그래도, 비록, 어쨌든, 괜히, 어쩌자고.

이렇게 작지만 강인해 보이는 단어들.


저의 ‘어쩌자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한숨도 나오고 웃음도 나오네요.  

어쩌자고 그때는.

어쩌자고 그날.

어쩌자고 나는.

뒤에 이어지는 말들을 공개적으로   없는  '어쩌자고'들이 모인  아마도 인생이겠죠.


모든 이들이 크고 작은 ‘어쩌자고’들을 매달고 살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팔목에 짤랑거리며 채워져 있는 귀여운 어쩌자고도, 등에 업혀 있는 조금 버거운 어쩌자고도, 발목에 매달려 자꾸 걸리적거리는 어쩌자고도 있겠죠. 사정없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스러운 어쩌자고도 있을 거고요. 나에게 붙어있는 이 어쩌자고들과 너무 고통스러운 관계가 되지 않는 것, 될 수 있으면 유쾌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마 우리 인생의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어쩌자고들에게 작은 응원을 보냅니다.   



+

시집을 보내주신 나묭님, 감사합니다.

브런치에서 만난 분들이 책을 보내주시는 일이 종종 있어요. 책 높이만큼 감사가 쌓이는 일입니다.

철학자이자 시인이신 진은영 님의 시집을 일부러 골라 보내주신 마음이 단번에 와닿았지요.

책으로 닿는 관계란 얼마나 조용히 아름다운 관계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아이라는 숲>은 6쇄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간은 그저 신났는데, 이제는 그럴만한 책인가 돌아보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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