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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ul 26. 2022

어떤 모사

서른 번째 시

2022. 7. 11.
문태준 ‘어떤 모사'
문태준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시인선 101)> 중에서


[어떤 모사]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를

보았다


간소한 선(線)


유리컵에

조르르

물 따르는 소리


일상적인 조용한

숨소리와

석양빛


가늘어져 살짝 뾰족한

그 끝

그 입가


그만해도 좋을

옛 생각들


단조롭게 세운 미래의 계획

저염식 식단


이 모든 것을

모사할 수 있다면


붓을 집어

빛이 그린 그대로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를

따라 그려보았다



최근에 '잃어버린 초등학교 시절 손글씨 되살리기' 프로젝트 중입니다


모사라는 단어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원본을 베낀다는 뜻이죠. 그대로 재현해보는 것.
사람들은 아름다운 미술작품을 모사해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글을 필사해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글씨며 걸음걸이, 제스처 같은 것을 따라 해보기도 합니다. 모사해보고 싶은 느낌을 받는다면 아마 거기서 애정이나 매력을 느꼈기 때문일 거예요. 좋아해서 같아져보고 싶은 마음, 마음에 들어서 따라 해보고 싶은 마음. 그러므로 맑은 마음으로 하는 모사는 사모하는 마음일 겁니다. 단어를 뒤집으면 이면이 보이는 이런 단어들 참 깜찍하죠. 이를테면 연인과 인연 같은 거요.


시인은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 그 간소한 선이 좋아서 따라 그려보았다고 합니다. 풀잎의 곡선은 유리컵에 조르르 물을 따를 때 생기는 곡선과도 닮았습니다. 난(蘭) 치는 법을 아주 잠시 배운 적이 있는데, 동양인들은 작은 풀잎들이 어우러지는 그 간소한 선 몇 개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느낀 사람들이구나 싶어서 감탄하게 되더라고요. 무성하게 가지를 치고 왕성하게 잎을 다는 그런 여름나무의 풍성함을 좇는 사람도 있지만, 곁가지 다 쳐내고 모든 옛 생각들 다 떨구고 맨 가지 하나 남긴 겨울나무의 간소함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시인은 겨울나무 쪽입니다.
엷고, 간소하고, 조용하고, 가늘고, 단조롭고, 염분이 낮은 그런 삶의 모습을 따르고 싶었나 봅니다. 화려하고 진한 색보다 엷은 그림자, 시끄러운 목소리 대신 조용한 숨소리, 한낮의 태양보다 스러지는 석양빛, 자극적인 맛이 아닌 심심하고 담백한 맛, 늘어나 커지는 것이 아니라 가늘어서 뾰족해지는.


모사에는 힘이 있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좋은 본을 통째로 직접 되풀이해보는 것은 굉장히 효과적인 학습법이 되죠. 또 거기서 아주 작은, 실뿌리 같은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거기서부터 나만의 것이 생겨나는 거죠. 무엇보다 내 삶이 그것을 따라 해보느라 각도를 약간 기울이는 일. 그렇게 기울인 각도로부터 삶은 또 새롭게 전개되니까요.


예술이든 철학이든 이론을 배울 때 'represent'라는 단어의 뜻을 들여다보거든요.

re(재, )present(현, ). 

여기서 ‘re’의 영역은 ‘나’의 영역이죠. 나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다시 표현되는가, 재탄생되는가. 정치에서 대표를 뽑는 일에 관해서도 'representative'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그들이 나의 의견을 그저 그대로 토씨 하나 달라질세라 전달하기만 하는 심부름꾼이 아니라 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의 ‘나’의 영역이 분명히 살아있기 때문일 거고요.


단조롭고 소박하고 아름답고, 맵시 있게 가늘어지는 그런 삶.

가만히 베껴내고 흉내 내 보고, 이렇게 모사하다 보면 비슷하게 닿게 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모사(謀事)꾼들이 판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런 모사(模寫)의 시간을 통해 숨소리를 가다듬음으로써 ‘나’를 가다듬을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참 좋은 시네요.


다만 내가 닿고 싶었던 그것과 나와의 경계를 잘 인식해야겠지요. 글과 그림과 음악을 짓는 작가들에게도, 일상을 짓는 사람들에게도, 모사(模寫)와 모사(謀事)의 구별은 참 어렵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따르고 싶을 만큼 내게 영향을 미친 것은 내게 엷은 그림자를 남기게 마련이지만, 어디까지를 내 것으로 인식하고 선포하는지가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모사가 다른 의미의 모사가 되는 일, 모사를 하다가 모사꾼이 되어버리는 일은 슬프게도 비일비재하니까요. 모사가 나의 영역을 흐리는 일이 아니라 나의 영역을 선명히 가다듬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늘 조심하고 경계를 잘 살피는, 간소하고 조용하고 염분이 낮은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뭔가 향기로운 것을 따라보고, 타인에게도 좋은 향을 남기는 그런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

같은 필사 모임에 계신 이혜령 님의 단상이 너무 좋아서 허락을 얻고 통째로 들어 왔어요.


, 이야기, 그림, 음악 그리고 모든 예술은 ‘사실 아니라 ‘진실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모사 통해 진실을 전해 주네요. , 그림자, 정적, 단조로움... 마치 시인과 내가 함께 있는 것처럼, 시인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간 것처럼  순간의 느낌,  순간의 진실을 이렇게 담백하게 전달해 주다니요. 시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진실을 찾아가는 구도자가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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