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Aug 09. 2022

쓰는 인류

서른한 번째 시

2022. 5. 10.

최영미, ‘쓰는 인류'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2019)> 중에서


[쓰는 인류]


5천년 전에 그들은

나무의 생김새를 흉내내어 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사람을,

손을 그려 손을 표시했던 수메르인들은

쓰기를 시도했던 최초의 인류


눈은 손이 될 수 없고

사랑은 미움으로 변할 수 없었고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펜으로

진흙 위에 일용할 양식을

소중한 것들을 기록했다

한번 새긴 글은 지우지 않았고

진흙판을 깨지 않고는 한 글자도 지울 수 없었다


위선의 종이 뒤에 숨어

내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빛의 속도로 분노와 적의를 실어나르는 우리는

누구를 가슴속에서 완전히 지우고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술을 아는 우리는


지우개를 발명하고

사랑과 증오를 오려붙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은 차단하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심심해서, 라고 말하는 인류는



마지막 두 연이 날카롭고 섬뜩했어요. ‘인류’라는 말 안에도 하나로 묶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들어가듯이, ‘쓰는 인류’라는 말 안에도 본질적인 변화가 생겼네요. 제가 글을 쓴다는 말을 하면서 하는 제스처가, 연필을 쥐고 쓰는 모양이 아니라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양이라는 게 저 스스로도 신기할 때가 있거든요.


모두들 쓴다는 행위에 대한 나름의 기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경필 쓰기 대회가 있었을 만큼 예쁜 손글씨를 중시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고, 서예 학원을 다니며 자랐거든요. 밤마다 정성껏 깎은 연필들을 필통에 넣어 책가방을 챙기는 작고 경건한 의식을 거르지 않았고요. 공책에 예쁜 글씨를 쓰기 위해 바른 자세로 앉아 여러 번 지우고 정성을 들이고, 화선지에 한 글자를 쓰기 위해 천천히 먹을 갈고 호흡을 가다듬고 선을 긋고 연습하고. 시 속의 고대인들처럼 확신에 가까운 신념을 가지고서 깨뜨리지 않고는 결코 지우지 않을 소중한 것들을 기록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쓴다는 것의 무게가 지금처럼 가볍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전의 쓰기가 고체의 느낌이라면 지금의 쓰기는 액체 같은 느낌이에요. 유동적이고, 조금 더 경쾌하고, 얼마든지 지우고 고치고 다시 불러올 수 있는 글자들이 이리저리 흐르는 느낌. 쓰는 인류보다는 빠르게 누르는 인류가 된 느낌입니다. 글씨 쓰는 걸 좋아하는 저도, 지금은 진중한 자세로 손글씨를 쓰는 건 편지나 카드를 쓰는 경우와 시 필사 정도. 나머지는 모두 호로록거리는 자판입니다. 그렇게 연습했던 한자 서예는 축의금과 조의금 봉투를 쓸 때 정도에서 쓰임새를 찾다가 외국에 살기 시작하면서 그마저도 없어졌고요. 서예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작은 붓과 먹과 벼루를 가져오긴 했는데, 화선지 수급이 어려워서 애써 가져온 친구들 위에 먼지만 쌓이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독일 초등학교 2학년인 저희 아이는 요즘 한참 학교에서 만년필로 필기체 연습을 한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색연필, 연필, 볼펜, 만년필, 수성펜 등 다양한 선의 질감을 느끼게 하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더군요. 여기저기 잉크를 묻혀가며 알아보기도 힘든 필기체 연습을 한 학기 내내 하는 걸 보고 있는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만년필로 하는 필기체 연습을 꽤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자신만의 필체를 가지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래요. 아이의 공책을 들여다보다가 특히 시선이 머물렀던 것은, 틀렸던 흔적들이 모두 남아있다는 사실이었어요. 만년필로 쓰면 지울 수 없기 때문에 틀린 것은 모두 긋고 그 위에 씁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어느 부분을 덤벙대다 틀렸는지, 어느 부분은 정말 몰라서 고민했는지, 그 자취가 모두 보이더라고요. 아마 조금 더 학년이 올라가면 틀리지 않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조금 더 조심하게 되겠죠. 인류는 몸이 편하기 위해 쉽게 지울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는데, 그것이 놓치는 마음의 영역이 있는 듯합니다. 그 무수한 틀린 자국들은 엄마인 제게 스트레스이기도 했지만, 뽑아둔 풀들이 널려있는 깨달음의 밭이기도 했거든요.


종이와 먹이 귀했던 시절, 글씨  자에 얼마나 정성을 다했을까  마음을 생각하다 보면 글자를 톡톡 쉽게 썼다 지울  있는 오늘날의 쓰는 행위와  곁의 마음가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손편지를  때와 이메일을  때는 아무래도 마음이 조이는 정도가 다르지요. 저희 세대라면 필름 카메라로 찍던 시절, 필름    장이 소중했던  마음을 아시잖아요. 무한의 자유가 있어서 고맙지만(예전의 저자들은 대체 책을 어떻게 썼을까요..),  자유를 과소비 혹은  소비해서는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쓰는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이 자유롭고 편해졌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향기입니다. 연필을 깎으면 기분 좋게 느껴지던 목향. 먹을 갈 때의 향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저는 지우개 냄새를 맡는 것도 좋았거든요. 저처럼 사람 글씨 보는 것 좋아하는 인간으로서는 모든 이들이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고유의 필체가 사라진 것도 아쉽습니다. 폰트라는 건 상품에 가까운 것이니까요. 최근에 읽은 책에서 17세기의 한글 필체로 적힌 숙명공주의 놀랍도록 어여쁘고 단정한 글씨, 그 옆에 답장으로 적은 아버지 효종의 중심이 멋있게 잡힌 반듯한 글씨, 그리고 한 살 아래 동생이었던 현종이 보낸 흐르는 듯한 귀여운 글씨체를 보는 일이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같이 즐거우시라고 가져와봤습니다. 왼쪽이 숙명공주의 편지와 효종의 답장, 오른쪽이 현종의 편지. 내용은 더욱 귀엽습니다. 얼마 전 서평을 올린 <멈춰서서 가만히>에서 만났습니다.

향기에 둘러싸여서 자신의 필체로 무언가를 썼던 인류는 조금 더 내 얼굴 같고 조금 더 향기로운 글을 쓰지 않았을까요. 무미건조한 공통의 폰트 뒤에서 익명성을 획득한 인류는 예전보다 자주 냄새나는 글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연필로 꾹꾹 눌러 적으면 지우개로 아무리 지워도 엷은 흔적이 남습니다. 그런데 버튼 하나로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다고 믿는 글들이 오히려 타인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요. 시에서처럼 "위선의 종이 뒤에 숨어/ 내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빛의 속도로 분노와 적의를 실어나르는" 사람들.  


감옥에서도 대체로 연필은 주어진다고 하죠. 인간이 쓰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상상만으로도 벌써 괴로워지는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예전에는 글자를 배워 기록을 남기는 일이 아주 소수만 할 수 있는 행위였다면,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을 남기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사실 글쓰기만큼 민주적인 영역도 드물지 않나 싶어요. 자본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고액과외를 한다고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렇게 인류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중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은 모음 하나 차이죠. 소수에게만 허락되던 성스러운 일이 다수에게 허락된 것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일입니다. 그 성스러움을 상스러움으로 바꾸는 것은 그렇게 쓰는 인류가 된 사람들이 하기에 따른 것이고요.


예전의 동굴과 예전의 진흙판은 불변의 모양새를 하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점멸하면서 날아다니는 오늘날의 글자들은 유연한 모양새를 하고 더 놀라운 폭발력으로 박제되기도 합니다. 지구 전체에 확 퍼져나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닿을 수 있다는 것, 평생 남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면 오히려 진흙판보다 더 주의해야 한다는 것, 내가 쓴 것을 내가 지운다고 해서 산뜻하게 지워지는 게 아니라는 것. 오늘날의 쓰는 인류에게 주어진 힘과 책임은 오히려 더 무섭고 무거운 것 같기도 합니다.


글자들로 꽉 찬 세상입니다.

쓰는 인류는 "사랑과 증오를 오려붙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은 차단하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심심해서, 라고 말하는 인류" 아니었으면 합니다. 쓰는 인류는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고 타인에게 위로를 주는 그런 다정한 인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모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