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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Aug 23. 2022

양파

서른두 번째 시

2022. 8. 4.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양파'
시집 <끝과 시작(문학과 지성사, 2016)> 중에서


[양파]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아수라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을.

하지만 양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 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의 알몸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아무리 깊숙이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한 꺼풀, 또 한 꺼풀 벗길 때마다

좀 더 작아진 똑같은 얼굴이 나타날 뿐.

세 번째도 양파, 네 번째도 양파,

차례차례 허물을 벗어도 일관성은 유지된다.

중심을 향해 전개되는 구심성(求心性)의 푸가.

메아리는 화성(和聲) 안에서 절묘하게 포개어졌다.


내가 아는 양파는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둥근 배.

영광스러운 후광을

제 스스로 온몸에 칭칭 두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건 지방과 정맥과 신경과

점액과, 그리고 은밀한 속성뿐이다.

양파가 가진 저 완전무결한 무지함은

우리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같은 양파를 두고 우리는 까도 까도 뭐가 계속 나온다면서 숨긴 게 많은 구린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데, 시인은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이자 순수하고 한결같은 ‘성공적인 피조물’이라고 말하네요. 오히려 인간들이 피부 속 어딘가에 아수라장을 가지고 산다고, 양파는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늘 그대로라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요.


우리는 누구나 내면에 더러워서 차마 내놓을 수 없는 쓰레기통을 하나쯤 가지고 있잖아요. 그 혼란하고 제멋대로인 내면을 다스리는 게 인간의 일생의 과업이겠죠. 그에 반해 양파는 시에서 표현하듯 완전무결한 순수함으로 '후광'을 두른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입니다. 양파의 생긴 모습을 스스로 후광을 칭칭 두른 존재로 표현한 것이 재미있어요. 양파의 단면을 보면 오오라를 여러 겹 두른 성인(聖人) 같잖아요.  


사실  시를 읽으면서 가장 마음 깊이 닿은 구절은 양파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있다" 부분이었는데요. 내면에 쓰레기통이 없는 존재,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투명하게 자기 안을 들여다볼  있는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울까 싶어서 거기에 닿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감히 접근할  없는 야생 구역" 감추지 않은 존재,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 품고 있지 않은 존재라면 과연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뭐가 있겠나 싶어요. 고통을 모르고 그저 찰랑거리는 행복 속에만 놓인 사람이 가끔 그게 행복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어렵듯이, 이런 양파 같은 존재라면 시선이 내면을 향한다는 것의 의미 자체도 옅어지지 않나 싶어서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쓰레기통 하나 몰래 내면에 만들어두고 거기에 온갖 쓸데없고 무용하고 더러운, 그래서 사실 달콤하고 재미있는 생각들을 담으며 사는 생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겉과 속이 달라서 재미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요. 가면이 너무 두꺼운 게 문제지 가면이 필요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한테 솔직하면 됐지 모든 사람에게 속을 남김없이 까보여주며 두루 솔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같은 것을 두고 "까도 까도 계속 나온다"라고 말하는 마음과 "겉과 속이 어쩌면 이렇게 같을까"라고 말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매일 양파를 자르고 썰고 다지면서도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어떤 하나의 비유며 생각이 널리 퍼져 견고히 굳어 있는 것이 이래서 섭네요. 아무 저항 없이 어릴 때부터   표현 안에 세상의 진리가 들어있는 경우도 많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멈추게 하고 눈을 가릴 위험도 있다는 . 그런 의미에서 속담이나 경구 같은 것을  번씩 뒤집어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 그런 의미에서 양파는 이제부터 제게 가장 철학적인 채소입니다.


한 꺼풀씩 벗길 때마다 좀 더 작아진 똑같은 얼굴이 나타난다는 부분이 정말 귀여웠어요. 허물을 벗어도 일관성은 유지되는 존재라니. ‘구심성의 푸가, 화성 안에서 절묘하게 포개어지는 메아리’라는 표현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푸가(fuga)는 하나의 멜로디를 중심으로 같은 멜로디를 조금 위나 아래에서 따라 하는 형식의 음악인데, 양파의 단면에서 푸가라는 음악 양식을 떠올리는 시인의 눈이란 정말 놀랍죠. 과일이나 채소의 단면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에 놀랄 때가 정말 많은데, 양파가 아름답기로는 정말 으뜸이라고 생각해요. 일정한 간격으로 여운이 커지는 소리가 어떤 물체로 형상화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눈물을 속 빼게 만들지만 달달 볶으면 또 그렇게 달콤해질 수 없는 그 반전 매력도 좋습니다.


앞으로 도마 위에서 양파를 만날 때마다 종종 소환될 것 같은 시.

그간은 조리법이나 일상의 상념으로 비집고 들어갈 구석 없었던 머릿속에 이제부터 양파를 썰 때마다 조금씩 저를 깊은 생각 쪽으로 끌어줄 시입니다. 여러분께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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