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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un 14. 2022

곁에 둔다

스물여덟 번째 시

2022. 5. 23.
류시화, ‘곁에 둔다'
류시화 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2022)> 중에서


[곁에 둔다]


봄이 오니 언 연못 녹았다는 문장보다

언 연못 녹으니 봄이 왔다는 문장을

곁에 둔다


절망으로 데려가는 한나절의 희망보다

희망으로 데려가는 반나절의 절망을

곁에 둔다


물을 마시는 사람보다 파도를 마시는 사람을

걸어온 길을 신발이 말해주는 사람의 마음을

곁에 둔다


응달에 숨어 겨울을 나는 눈보다

심장에 닿아 흔적 없이 녹는 눈을

곁에 둔다


웃는 근육이 퇴화된 돌보다

그 돌에 부딪쳐 노래하는 어린 강을

곁에 둔다


가정법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보다

가진 게 희망뿐이어서 어디서든 온몸 던지는 씨앗을

곁에 둔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곁에 둔다




시인이 곁에 두려고 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제 굳은 어깨를 죽비처럼 내리칩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정말 귀하지요. ‘두라’고 남에게 명령하지 않고, ‘둔다’고 나에게 다짐하는 시라서 더 좋았습니다.


파도를 마시는 사람,

걸어온 길을 신발이 말해주는 사람,

심장에 닿아 흔적 없이 녹는 눈,

돌에 부딪쳐 노래하는 어린 강,

가진 게 희망뿐이어서 어디서든 온몸 던지는 씨앗.


어쩜 이렇게 하나하나 아름다울까, 많이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특히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마음속에 파도처럼 남았어요.


그런데 웃는 근육이 퇴화된 돌은 어쩌다 그런 얼굴이 되었는지, 물고기는 어째서 가정법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응달에 숨어서 겨울을 나는 눈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들어보지도 않고 멀리 두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인이 주신 깨달음과는 별개로, 저는 오히려 이들을 곁에 두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돌에 부딪쳐 노래하는 어린 강을 사랑하고  노래에 감탄하며 살고 싶지만, 웃는 근육이 퇴화된 돌을 곁에 두고 쓰다듬어주고 싶어요. 심장에 닿아 흔적 없이 녹아버리는 눈에 감탄하면서 비슷한 용기를 내보고 싶지만, 응달에 숨어서 겨울을 나는  곁에 말없이 있다가  얼어붙은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에서 곁에 두라는 것은 마음에 두고, 곁에는 요 녀석들에게 슬쩍 자리를 내주는 삶도 괜찮지 않을까요.


시를 곁에 두는 삶이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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