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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an 17. 2023

혜화역 4번 출구

서른아홉 번째 시

2022. 2. 18. 

이상국,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시집 <뿔을 적시며>에서


[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실은 자식농사라는 말에 약간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왠지 풍년, 흉년 같은 결과주의적인 느낌이 좀 있어서요. 자식농사 잘 지었다, 이 말은 아이가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명랑하게 클 때보다는 주로 좋은 학교에 다니거나 번듯한 직장을 다닐 때 엄지를 쓱 추켜올리며 해주는 말이잖아요. 농사는 아무래도 원하는 작물을 심어서 기대한 소출을 내는 행위니까, 콩 심은 데서 팥이 날 수 있는 자유도 없고요.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불편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네요. 그냥 말 그대로 내가 씨앗을 심어 귀애하면서 기른 그런 느낌으로의 농사. 그저 아름다운 '생명의 이어짐' 같은 느낌이요.  

 

저희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병을 얻으셔서, 모든 사업을 접고 제주도에서 혼자 요양하며 지내셨어요. 어떤 분이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이거라도 대신 받으라고 해서 받아 두셨던 땅이 있었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그리로 가셨는데 그 뒤로는 가끔 서울 오실 때만 볼 수 있었죠. 그전에는 팔베개하고 토닥토닥 노래도 불러주시고, 그림도 그려주시고, 술냄새 풍기며 집에 오실 때 호떡이며 치킨 같은 것도 사 오시고, 재미있는 얘기도 자주 해주셨던 기억이 있는데 그렇게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고 나서는 왠지 사이가 어색해졌어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극도로 말없는 아이가 되었던 저는 정말 아빠와 대화 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중 1 때 집에 와 계셨던 아빠가 제 생일이라고 웃으시면서 조그만 지갑 모양의 반짇고리를 내밀던 기억과(아직도 색감과 촉감까지 기억나요. 너무 기뻤거든요.), 대학생이 된 제 방에 있는 책들을 몰래 한 권씩 가져다 읽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계실 때 제가 마침 대학원 진학을 앞둔 백수여서 엄마와 교대로 병실을 지킬 수 있었는데, 눈이 잘 안 보여서 못 깎겠다면서 손톱깎기를 저에게 내미시더라고요. 조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요. 그날 처음으로 아빠 발톱을 깎아 드리면서 울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습니다. 아빠는 분명 조그만 제 발을 많이도 어루만져 주셨을 텐데, 저는 아빠 발을 처음 만져본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어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아빠 친구분들을 많이 뵈었는데 하나같이 네가 그 셋째구나, 네 얘기 참 많이 들었다, 하시면서 따뜻하게 웃어주시더라고요. 아빠는 아빠의 방식으로 저를 많이 아끼셨던 것 같아요. 아빠가 병을 얻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살가운 부녀로 지낼 수 있었을까, 가끔 궁금합니다. 


최근에는 예전 사진을 부탁하는 친구가 있어서 싸이월드를 뒤지다가 아빠가 쓰시던 다이어리를 찍어둔 사진을 발견했어요. 진민이 생일, 정민이 생일, 외할아버지 기일, 빨간색으로 표시도 해두신 아빠. 연필꽂이에서 빨간 펜을 꺼내 찬찬히 표시를 하셨을 아빠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물컹해졌습니다. 

아빠 얼굴 만난듯 반가운 필체에 마음이 와르르 

저는 아빠 기일에 제멋대로 상을 차려놓고 아빠를 부릅니다. 독일에 살게 된 이후로는 아빠가 좋아하셨을만한 독일 소시지나 치즈가 든 음식들과 함께, 제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독일 맥주들을 꼽았다가 매년 한 잔씩 따라 드려요. 당뇨 때문에 생전에 마음껏 드시지 못했던 단 음식들도 일부러 챙기고요. 그리고 드실 동안 아빠가 좋아하셨던 노래를 틀어드립니다. 재작년에는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였고, 작년에는 이츠와 마유미의 '고이비또요'였어요. 아이들은 자기도 할아버지랑 같이 먹을 거라면서 뽀로로 우유컵을 들고 그 앞에 앉곤 합니다. 근본도 없는 제사상이지만 아빠가 좋아하실 거라고 믿어요.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그 촌스러움을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아빠가 많이 보고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아빠 사진입니다.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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