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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Feb 21. 2023

멧새소리

마흔 번째 시

2022. 6. 23.

백석, ‘멧새소리'


[멧새소리]


처마 끝에 明太를 말린다

明太는 꽁꽁 얼었다

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明太다

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밖에 뭘 내다 말리는 게 참 많았던 것 같아요. 시래기, 고사리, 쑥 같은 나물이며 잘게 썬 늙은 호박, 버섯이랑 고추 같은 거요. 햇볕을 머금고 바싹 말라가는 먹거리들을 보고 향을 맡으면서 똘망한 어린 눈들이 자연의 섭리라든가, 시간을 두고 준비하는 마음이라든가, 먹고사는 일의 수고 같은 걸 자연스럽게 느꼈지요. 지금은 빨래도 마음껏 내다 널 수 없는 문화가 되어버렸고, 황사나 미세먼지 때문에 밖에 뭘 말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졌네요. 먹을 것들은 모든 과정을 다 밖에서 끝낸 채 그것도 택배 상자 안에 담겨 문 앞으로 띠로롱 배송되는 경우가 많으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 세대 더 올라가 처마가 있었던 집들은 이렇게 처마 끝에 매달아 두고, 말라가는 것들과 눈을 맞출 수 있었겠죠? 방이나 마루에 앉아서 밖을 보면 대롱대롱 매달린 것들이 보였을 테니까요. 눈과 입이 달린 것을 매달아 두고 지켜보는 마음은 곶감 같은 것을 볼 때와는 또 달랐을 것 같아요.


명태는 날이 차야만 썩지 않게 말릴 수 있었을 테니, 시인은 그 녀석이 밖에서 꽁꽁 얼었다 살짝 녹았다 하면서 고드름을 달고 모진 눈바람을 견디는 모습을 지켜봤을 겁니다. 그 오랜 과정 속에서 비로소 명태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이런 시를 써낼 수 있었겠지요.


백석 시인은 인간이 얼어붙는 건 문턱 때문이고, 고드름은 가슴에 달린다고 합니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의 문턱은 물리적 장소도, 비유적 이유도 될 수 있겠죠. 어느 경우든 “서러웁게 차가워지는” 마음이 사박한 얼음 얼듯 생겨나는 건 마찬가지네요. 우리가 주로 좌절하는 공간으로서의 문턱. 문턱에서 얼어붙어 가슴에 얼음 못이 박히는 장면, 문턱 때문에 마음으로 흘린 눈물이 고드름처럼 길게 얼어붙는 장면.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서 문턱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시를 읽다 문득 멧새소리가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문태준 시인이 이 시에 대해 쓰신 글이 있네요.

 

시가 발표된 때는 1938년. 이 시를 쓸 무렵 백석은 함경남도 함흥에 살았다. 함흥에 살면서 동해(東海)에선 날미역 냄새가 난다고 썼고, 관북 지방에서 잡히는 가자미와 가무락조개에 대해 썼다. (그는 동해의 조개가 되고 싶다고 썼고, 가자미는 흰밥과 빨간 고추장과 함께 가난하고 쓸쓸한 밥상에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올라오던, 먹어도 물리지 않는 생선이라고 썼다!)


이 시의 온몸에는 한기가 들어 있다. 민가 처마에 겨울 명태가 매달려 있다. 추운 세상에 명태에 고드름까지 달렸으니 더 여위고 기다랗고 두 눈은 퀭해 보였을 터. 그 명태의 궁색을 화자의 처지에 겹쳐 놓았다. 객지에 사는 이의 외로움과 쓸쓸함의 높이 같은 것. 그런데 왜 제목이 '멧새 소리'인가. 멧새 소리는 뭍과 숲과 고향의 소리이니 바다와는 한참 멀다. 바다에서 잡혀온 명태나 고향을 떠나온 화자나 다를 바 없다. 처마 끝 꽁꽁 언 명태를 바라보는 이의 객수가 시린 뼛속에 더욱 사무쳤으리. (문태준, 시인)


예전에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백석은 저의 겨울의 시인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푹푹 나리는" 눈과, 나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나타샤와,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를 떠올리실 텐데요. 실은 보스턴 쪽에서 유학할 때 참 많이도 떠올렸습니다. 정말 푹푹 내려서 ‘내가 차를 어디다 주차해 뒀더라-‘, 하고 난감해지던 엄청난 양의 눈, 그리고 응앙응앙 우는지 예이이이- 하고 우는지 모를 파란 당나귀들 때문에요. (미국 민주당의 상징이 당나귀이고, 저는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 보스턴은 민주당이 강세인 지역이고요.)


겨울이면 생각날 시가 하나 늘어서 좋습니다. 짧아진 해가 금방 저물고 날이 서럽게 차가워지면 꼬리에 고드름을 달고 처마 끝에 매달린 명태가 떠오를 테고, 저는 이제 세 계절을 지나 다시 돌아온 제 앞에 놓였던 문턱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겠지요.  


©박상훈
멧새, 요렇게 예쁘다니 세상에. ©설남아빠

마침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선생님의 맛깔난 글이 있어 가져다 둡니다. 동태이자 명태이자 생태이자 북어이자 황태인 (아이고 숨차다) 이 생선과 문인들의 이야기가 얼큰하고 감칠맛 나게 엮였습니다.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1200300045/?utm_campaign=rss_btn_click&utm_source=khan_rss&utm_medium=rss&utm_content=total_news&fbclid=IwAR0AV0qf8tAKmZrBlqsUaHynMQLoNv-Ay_7LkLGm1u6wKMc4aOhAg1i2zLA


+
요즘 또 글을 못 쓰고 있어서 예전에 읽었던 시, 예전에 써두었던 글을 꺼냈습니다.


지난주에 올렸던 한겨레교육 온라인 강의 관련해서는 적정 인원이 차지 않으면 연기가 되거나 폐강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간 강의를 제법 해왔지만 제 기억으로는 첫 유료 강의인데, 역시 저는 돈이랑은 안 맞는 사람인가 싶기도 한 것이... :) 뭐 안 그래도 시간에 쫓기고 있으니 정말 폐강이 된다고 하면 휴강된 학생의 마음으로 반갑게 맞아볼 예정입니다. 다만 같이 준비하신 한겨레 팀에 폐를 끼치게 되는 건가 싶어 그건 조금 걱정이군요. 뭐 일주일 더 기다려 보죠.   


여기는 이제 귀염둥이 설강화와, 보고 있으면 제 눈동자도 보라색으로 물들어버릴 것 같은 크로커스가 피기 시작했어요. 이제 한 달이면 차츰 숲이 볼록해지기 시작하겠죠. 여러분 계신 모든 곳에 봄이 오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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