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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Dec 20. 2022

서른여덟 번째 시

2022. 9. 26.

윤동주, ‘장'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에서


[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生活)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生活)을 골골이 벌여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온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生活)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씁은 생활(生活)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장(場)이라는 단어의 어감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습니다. 장과 시장, 시장과 마트, 그리고 마트와 경제용어로서의 마켓은 각각 느낌이 참 다르네요.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장은 자본의 입김보다는 생활의 한숨에 밀착된 느낌이 더욱 강했겠지요. (그런데 이 시절은 아낙네들이 판매 담당이었던 걸까요.)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왔다가, 외치고 싸우고, 올망졸망한 그것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는. 생활이라는 단어에 붙는 동사를 이렇게 무수히 나열해 놓고 보니 그 동사들만큼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고 이고 지고, 저울질하며 사는 인생. 시들은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살 생(生)에 살 활(活). 오랜만에 생활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되풀이해 쓰다 보니 생활이라는 건 그저 ‘살고 또 살아가는 것’이구나 싶네요.


장에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산다(live)와 산다(buy)의 우리말이 다르지 않다는 게 늘 깜찍합니다. 삶이 피곤하고 힘들 때 시장에 가면 파도가 발을 적시는 느낌이 들잖아요. 지난여름 한국에 갔을 때도 비가 오는 날 친구랑 시장에 발을 들였던 순간이 유독 기억에 남아요. 시장만이 줄 수 있는 느낌과 힘과 생각들이 있잖아요. 시장이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한 해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외치고 싸우고 바꾸고 되질하고 저울질하며 살아봐야겠습니다. 안고, 외치고, 바꾸고, 라는 동사를 많이 쓰는 삶이면 어떨까 싶지만 여전히 이고 지고 저울질하고 그러면서 '씁은' 생활을 살겠죠. 귀퉁이가 좀 깨진 커다란 돌에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글귀를 새겨 학교 뜰 안에 놓아두었다는 고(故) 채현국 선생님 말씀처럼, 원래 사는 맛은 쓴 맛이 기본이겠죠. 하지만 이 기본을 알면 삶의 단맛을 알알이 느끼는 감각이 더 깊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 한 해 꽤 열심히 살았고, 평안한 연말을 보낼 수 있음에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도 가끔은 시들시들할지언정 꾸준히 돌아오는 장날처럼 감사할 일들이 꾸준하기를 바랍니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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