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Oct 04. 2022

사과를 먹으며

서른여섯 번째 시

2022. 9. 15. 함민복, ‘사과를 먹으며'

함민복 시집 <우울씨의 일일(문학동네, 2020)> 중에서


[사과를 먹으며]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시를 언뜻 보고, 요렇게 쓰면 사과처럼 보일 줄 알았는데 실물은 다리를 꼬고 있는 오징어에 가깝군요


사과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독일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제게 시월의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렁주렁'이에요. 모든 나무들이 앞다투어 가지에 둥글고 충만한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습니다. 저희 동네에는 특히 사과나무가 많아서 담장 밖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사과가 발끝에 차인답니다. 어릴 적 읽었던 <깃털 할머니(독일어로 그림 형제의 <Frau Holle>라는 동화입니다)>라는 동화에서 플로라에게 "가지가 너무 무거워, 가지를 흔들어 -"하고 부탁했던 이유를   같은, 그런 사과나무들이 보입니다. 어제는 아이와 손잡고 산책하는 길에 가지에 달린 사과들의 탐스러움에 감탄했고, 동네 아저씨가 정원 사과나무에서 뚝뚝 떨어진 사과들을 가방에 주워 담는 모습이 좋아서 한참을 쳐다봤어요.

시월의 단어: 주렁주렁

사과처럼 인간 세상에서 품은 이야기가 많은 과일이  있을까요.

신학자에게는 이브의 사과가, 과학자에게는 뉴턴의 사과가, 혁명가라면 빌헬름 텔의 사과가, 미술가라면 세잔이나 마그리트의 사과가, 아이들에게는 백설공주의 사과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있지요. 제가 제 책에도 홉스와 로크의 사과나무를 설명하느라 기다랗게 썼던 부분이에요.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네 번째 챕터: 챕터 이름이 이토록 낯선 것을 보니 술을 그만 마셔야겠습니다

제 마음속 3대 사과나무라면 책에도 썼듯 빨간머리 앤이 도깨비 숲에서 길버트와 따먹던 야생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 그리고 정치철학을 배울 때 가상으로 머릿속에 그렸던 홉스와 로크의 사과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이었는데, 이제 홉스와 로크는 묶어서 하나로 치고 함민복 선생님의 시 속 사과나무를 한 그루 새로 들여야겠습니다.


시인은 사과 안에 들어있는 우주를 내보여줍니다. 우리는 사과를 먹으면서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고,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고,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고,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인류의 지식도, 농부의 땀방울도, 우리를 잡아 앉히는 중력도 들어있고요. 또 나무의 모든 부분, 즉 잎새와 가지와 나이테와 뿌리가 오롯이 들어있습니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은 뭐였을까 상상하면서 웃었고, 사과나무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는 부분이 참 좋았어요.

오늘의 낙서

그간 사과를 먹는 행위는 그저 미각이라는 단일 감각이 지배적인 행위였는데, 시를 읽으면 이렇게 우주의 조각들이 공감각적으로 모여 있는 행위임을 깨닫게 되니 얼마나 고마운지요. 이제 사과를 먹는 일에 우리는 여섯 가지 감각을 모두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그 작고 빨간 공 안의 우주를 보겠지요. 감각을 일깨우고 차원을 뒤집는 시의 어마어마한 효능이란.


사과를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구석구석 우주적인 일인지 읊조리는 시를 보고 있으니 세상 만물이 다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옮겨 적는 내내 사과 안에 누군가를 넣어봤어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너에게 닿은 햇살, 너를 흔들던 바람, 너를 감싸던 눈송이를 껴안는 일이 되겠구나. 너를 키운 모든 것들, 네가 있게 한 중력이며 우주까지 그 모든 것을 너를 통해 만나는구나 하고요.


사과향 가득한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동양철학이랄까, 종교적인 뉘앙스가 묻어납니다. 우리가 이 별 안에 발을 닫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이어져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흙에서 도망쳐보려는 꿈을 꾸지만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 내가 먹는 사과는 결국 나라는 것. 내가 보는 너도 결국은 나라는 것. 허무란 언제나 이렇게 뭉클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와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