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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ul 18. 2023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마흔여섯 번째 시

2023. 5. 15.

최승자,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중에서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아침 식탁, 커피 한 스푼의 無

커피 물 한 잔의 無限


(창밖에서 한 아이가

사과를 먹고 있습니다

한 세계를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새가 울고

달이 지고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무()가 무한이 되는 아름다운 아이러니를 커피와 커피 물의 관계에서 봅니다. 녹아든다, 우러난다라는 동사가 향기롭게 번지네요. 그렇게 무는 무한이 되고 영은 영원이 되는가 봅니다.


   삶이란 게 그런 거겠죠. 아무것도 아니지만 영원할 수도 있는 것. 무()이지만 한없는 확산도 가능한 것. 우리는 사소하고 하찮은 존재들이지만 그 자체로 세계이고 우주이며, 매일매일 이 세계를 맛있게 먹어 치웁니다. 무한의 커피를, 온 세계가 빨갛게 들어있는 사과를요. 함민복 시인도 사과 먹는 일을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사과나무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 일'이라고 썼었죠.


   시인은 커피가 놓인 아침 식탁에 앉아있나 봅니다. 창밖으로는 사과를 맛있게 먹는 아이가 보이고요. 그 찰나의 순간에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커피 향처럼 우러나오지 않았을까요. 피나 눈물이나 암흑 같은 것이 아니라, 불변의 바위나 호랑이 가죽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서 구름 한 점 쓰다 가겠다는 말. 최승자 시인의 쇳소리 같은 문장, 비명 같은 시에 익숙했던 저는 이 가볍고 상쾌한 문장이 왠지 기뻐서 마음이 찡했어요.  


   구름 한 점 쓰다 간다는 말이 볼수록 참 좋네요. 변하지 않는 돌멩이 하나, 툭 터져 피어날 씨앗 하나를 쓴다는 게 아니라 그저 스르륵 풀어져 없어질 무정형의 구름을. 하지만 비로 내리고 강과 바다가 되어 순환하면서 무한한 생명들과 만나 부비며 살아갈 구름을 말이죠. 기를 쓰고 뭔가 피워내지 않아도, 불변의 무언가를 남기지 않아도, 그렇게 세상에 와서 구름처럼 살다가 보드랍게 풀어져 사라질 수 있다면 참 좋지 않은가요.


   구름 한 점 머리에 쓰고 살아도 좋겠다 싶어요. 적당히 비도 내렸다가 해도 가려줬다가 하는 몽글몽글한 구름 모자를요. 삶에는 태양만 필요한 게 아니라 구름 한 점 정도의 그늘과 쉴 곳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눈물을 들키지 않게 비를 내려주는 구름 모자가 있다면, 흘려보낼 것들을 쌓아두지 않고 가만히 흘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나면 무지개가 뜰 지도 모르죠.    

안녕달 작가님의 그림책 <수박 수영장>에도 구름 장수의 구름 양산과 먹구름 샤워 이야기가 나옵니다. 감탄이 나올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페이지.

   구름 모자 쓰신 '산 할아버지' 동요 다들 아시죠?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를 "산 할아버지 구르마 잡쉈네”로 알고 자라나 성인이 된 저의 반려인을 급고발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깔깔. (미안해요. 당신이 오늘 내가 쓰는 구름 한 점입니다.)   



   <동굴 밖으로 나온 필로와 소피>는 예약 판매 중인데 반응이 좋은 것 같습니다. 기쁘네요. 정식 출간은 21일입니다.

책 아직 안 나왔는데 베스트라니 경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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