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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y 21. 2024

액자의 주인

쉰여덟 번째 시

2023. 9. 7.
안희연, '액자의 주인'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시선 393)> 중에서


[액자의 주인]


그가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손목에서 손을 꺼내는 일이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일이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꾸만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싶어했다


아직 덩어리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할 수 없이 주먹을 내밀었다

얼굴 위로 진흙이 줄줄 흘러내렸다




   시인은 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고, 시를 읽는 사람은 그 여백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아리송한 시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생각을 뻗어보는 게 재미있습니다. 정답 없이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기회라 더 좋아요. 시는 아름다움과 모호함으로 짜인 직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내 눈에만 보이는 무늬를 찾아내는 게 즐겁거든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렴풋이 무늬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데, 저는 그 순간을 무척 좋아합니다.
 
   제게는 우선 이 시가 누군가와 악수를 하기 위해, 즉 타인과 손을 잡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 자신이 갇혀 있던 액자를 깨뜨리고 나오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혔어요. 손을 잡는 것은 3차원의 일이니, 내가 들어있던 2차원의 손목에서 손을 꺼내고,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일이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겠지요.

   손목에서 손을 꺼내고,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일. 이 부분을 이해하려고 머금다 보니 '목'이라는 낱말에 시선이 가는군요. 살면서 '목'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 봅니다.


   뭔가를 이어놓은 잘록한 부분.


   목, 손목, 발목, (와중에 허리는 꼭 잘록한 게 아니라서 목이 아닌가... 생각하며 혼자 위안을 받아봅니다. 조상님들 감사해요!) 병목. 그 잘록함이 묘하게 아름답고, 또 약간은 슬프기도 해요. '길목'이나 '개울목'의 목도 비슷한 건가 생각해 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떤 중요한 것으로 가는 통로, 혹은 이어놓은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맥이 닿는 것도 같네요. 소설을 읽을 때는 새로 만난 낱말이나 신기한 단어들을 선물처럼 찾아보게 된다면, 시를 읽을 때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말들이 새롭게 다가오곤 합니다.


   내 앞에 선 사람. 그는 누구일까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나의 손을 잡을 수 있길 초조하게 기다렸나 봅니다. 나(의 마음)는 아직 뚜렷한 윤곽이 정해지지 않은 덩어리에 가깝지만, 그래도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싶어 하는 상대의 그 마음에 반응하고 싶었나 봐요. 주먹을 내미는 것은 코로나 시대의 인사법이긴 했지만, 이 시에선 나를 짓누르고 있는 유리를 깨기 위함이었던 게 아닐까요. 정병근 시인이 말했던 ‘유리의 기술’처럼, 숨도 쉬지 못하게 마치 과학실 표본처럼 나를 전시하며 짓누르고 있던 유리를 깨니 마치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이던 햇살처럼’ 얼굴 위로 진흙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이제 비로소 납작한 평면의 그림이 아닌 3차원의 덩어리로서의 내가 흘러내리는 것 같아요. 피처럼 흐르는 진흙을 봅니다. 그 무엇도 아닌 ‘덩어리’에 불과하더라도, 2차원의 세상이 아닌 3차원의 세상에서 주인처럼 살고 싶은 마음. 혹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내 세계를 부수고 나가는 일이 될 수도 있겠죠. 아직 모호한 덩어리 같은 감정이지만, 너의 손을 잡고 익숙한 나만의 액자 속 세계에서 나가보겠다는 결심.


   액자가 의미하는 많은 구속들을 상상해 봅니다. 짓눌려 뭉개져 있는 줄도 모르고 안락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액자 속 사람들과, 그걸 깨려고 주먹을 내미는 사람들. 그걸 가능하게 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당신. 이렇게 읽어보면, 피가 줄줄 흐르더라도 깨고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응원의 마음이 생기는 시입니다.


   한편, '할 수 없이'라는 표현에 오래 머물러 보면 시가 또 전혀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나는 '액자의 주인'으로서,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부분을 액자에 담아 전시해 왔어요. 깔끔하게 재단된 평면의 세계.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를 거대한 액자라고 생각한다면, 거기에서 보여주는 나의 모습 같은 거겠죠. 내 마음대로 고르고, 오리고, 때로는 필터까지 씌워서 전시하는 내 모습. 삶은 동영상이지만 그곳에 올라오는 것은 고르고 골라낸 찰나의 스냅샷이듯이.   


  그런데 온라인에서 평면적으로 만나던 누군가가, 나를 3차원인 현실로 끄집어내 관계를 맺고 싶어 해요. 손목에서 손을 꺼내고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것처럼, 온라인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나를 끄집어내는 일이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습니다.


   그가 왜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민 손을 잡지 않을까 봐, 나에게 응답하지 않을까 봐 불안했던 것일까요?


  액자의 주인은 묻습니다. 저는 아직 설익었어요. '나'로서 또렷하게 모양이 잡힌 것이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인데, 그러니까 시쳇말로 '에지(edge, 모서리)'가 없어 덩어리에 불과한 사람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악수를 청한 이가 손을 내민 채 또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나 봅니다.


  어쨌든 액자의 주인인 나, 계정의 주인인 나는 '할 수 없이' 주먹을 내밀어 액자를 깨뜨리고 나갑니다. 줄줄 흐르는 것은 내 마음일 수도 있겠고, 2차원의 평면이 3차원의 현실로 변하면서 그 사이를 채우는 진흙 같은 일상성일 수도 있겠어요. 전시하고 싶지 않았던,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오물 같은 것들이 내 얼굴 위로 흘러내려 나를 덮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어땠을까요?


   저는 흘러내린 진흙 덕분에 비로소 '구경'이 아닌 '만남'이 가능해졌고, 그래서 결국 시적 화자도 진정한 '주인'이 되었을 거라고 믿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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