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사람들의 연대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들은 정말 힘들다.
2-3년을 매일같이 마음대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퇴근이나 휴가도 없이 사는 삶, 그게 엄마의 삶이다. (내가 자꾸 엄마의 삶이라고 하는 건 이게 엄마들의 몫이어서가 아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아빠들은 이런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혹시라도 오해가 없기 바란다. 물론 이 시대의 아빠들이 이전 세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그 부분에 기쁨과 희망을 느낀다는 점을 꼭 밝히고 싶다. 존경하고 싶은 다정한 아빠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 나는 종일 시계를 보며 남편이 돌아올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래야 내가 샤워라도 할 수 있고 화장실이라도 맘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비록 아가가 그 문 앞에서 눈물로 시위를 하더라도 밖에 누가 있는 것과 아무도 없는 것은 천지차이니까.
하지만 엄마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실 육아 자체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것 같다.
나의 이 정신-육체-감정 노동의 쓰나미가 그저 지나가는 일상일 뿐이라는 것. 이 어마어마하게 힘든 과정을 감내해도 사회적 인정이나, 승진이나, 연봉 인상 같은 게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 이 시기를 지나면 달콤한 보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내 아이가 건강하고 어여쁘게 자란다는 개인적인 보상 빼고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내가 한없이 낮아지고 내 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불안감. 아이는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쁘지만 내가 이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동안 이 넓은 지구, 이 복잡한 사회에서 나만 혼자 집구석에서 도태되는 것 같은 느낌. 우리 집은 나 없이는 못 굴러가는데 이 세상은 나 없이도 더럽게 잘 굴러가고 있구나, 하는 씁쓸한 마음.
"너는 집에서 도대체 하는 게 뭐냐. 집에서 놀면서 애 하나 보는 게 그렇게 힘드냐."
혹은
"너는 배운 것 아깝게 그렇게 집에만 있을 거냐. 집에서 애나 보라고 내가 그 공부를 시켰는 줄 아니."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그런 말들이 어디 방송에서라도 들려오면 나는 덩달아 슬펐다.
안 그래도 힘든 마음을 할퀴는 말들.
(네 자식은 네가 키워야지 그깟 거 얼마나 번다고 그렇게 애를 밖으로 내돌리니. 이런 말도 물론 동일하게 아플 거라는 거 압니다. 세상엔 왜 이렇게 엄마들을 아프게 하는 말들이 많을까요.)
이렇게 엄마들의 마음이 슬퍼지는 것은, 온 에너지를 쏟아 소중한 이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 내도 사회가 그 행위에 그만큼의 가치를 부여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경단녀라는 단어는 공공문서에도 버젓이 등장한다고 들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엄마라는 직업, 육아라는 노동을 '경력'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책임과 희생은 우선 엄마에게 지우면서, 그동안 우리 사회가 그 대가로 준 것이라곤 고작 립 서비스 정도였던 것 같다.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 아름다운 모성, 젖은 손이 애처로운 그분들.
시간이 지나 세상에 혐오의 정서가 강하게 서리면서, 이제 립 서비스는커녕 유모차를 끌고 나와 커피 한 잔 사 마신다는 이유로 엄마들은 벌레와 동급이 되기도 한다. (저기, 벌레는 커피콩은 갉아먹어도 커피를 후룹후룹 마시진 못 하거든요. 흥.)
많은 엄마들이 사실 엄마의 이름으로만 사는 것을 힘들어한다. 엄마라는 것은 명예직일 뿐, 경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독특한 가치를 인정받지도 못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는, 돈도 못 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마땅한 직업 없이 '집에서 노는 사람'일 뿐이다(놀다니, 내가 진짜 얼마나 놀고 싶은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스스로를 위로해 보고 매일매일이 행복한 척 스스로에게 거짓말도 해 보지만, 우리는 놀이터에서, 마트에서, 마음이 어딘가 멀리 나가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을 만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아이에 집착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집착하는 엄마들을 더러 본다. 그렇게라도 보상이, 칭찬이, 응원이 받고 싶은 것이다.
집에 처박힌 엄마들을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그게, 배가 불러도 디저트 들어갈 구석은 있듯이 그렇게 바빠서 화장실 갈 틈은 없어도 인터넷 들어갈 틈은 있다. (대체 이 비유가 맞는 비유인가.)
남들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아이의 사진을 수십 장 올려놓고 누군가 건네주는 예쁘다 한 마디에 '그래, 내가 이렇게 예쁜 아이를 키우고 있지.'하고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고, 이유식 만드느라 난장판인 부엌 안에서 기적적으로 깨끗한 스팟을 찾아 이유식 사진을 찰칵 찍어 올린 뒤 누군가 달아주는 “이런 걸 직접 만들어 먹이다니, 정말 대단해요.” 한 마디에 작은 힘을 낸다.
하지만 개운치 않다. 힘들다.
이런 자의 반 타의 반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노예 같은 생활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불평만 하기에는 내 삶이 아깝고 저런 작은 보상으로는 왠지 처량하다.
사회가 바뀌고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너무나 정답인데 그 정답을 맞히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대신 나는 소소하게, 따뜻한 여성들의 연대, 나아가 따뜻한 사람들의 연대가 우선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예를 들어, 그저 알고 지내는 것 자체가 나에게 축복인 후배 Y.
매력적인 사람들과 매력적인 일을 하고 있는, 한 회사의 대표다.
그녀는 자기가 임신했을 때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고, 승진하고, 팀을 챙겨야 하는 직장 동료이자 선배 엄마들의 조언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며 조용히 받쳐주던 그룹.”
"(일 하느라) 임신하고 잠 못 자면 애가 안 잔다더라."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 "친정엄마면 몰라도 어떻게 남의 손에 맡겨?" 같은 말 대신 도우미 소개업체에 전화를 걸어주고 이모님과 같이 잘 지내는 팁을 알려주는 선배가 있었다는 것, 그게 무엇보다 고맙더라는 것이다. 가치관과 제도의 개선, 정치적 변화라든가 행정적 지원도 너무 중요하지만 실제 엄마들의 삶에 와 닿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그녀는 ‘워킹맘’이라는 대분류로 대략 이런 게 필요하겠지, 하고 만들어내는 듯한 지원은 안 반갑다고 했다. 어떤 ‘워킹’을 하고 어떤 기준을 가진 ‘맘’인가에 따라 우리는 아주 많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전업맘도 마찬가지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진 맘인가에 따라 우리는 정말 많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받쳐주며 함께 이루어내는 작은 변화들이 중요하다. 저렇게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며 조용히 받쳐주는 그룹도 좋다. 활발하고 사교적인 성격이라면, 자기와 결이 맞는 사람들을 몇 명 네트워킹해서 소규모로 공동 육아 모임 같은 것을 꾸려봐도 좋을 것이다. 친구들끼리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온라인 독서모임을 만들고, 그걸 발전시켜 아이와 함께 하는 '아빠 캠프'로 만들려는 멋진 움직임도 본 적 있다. 우리 과의 한두 학번 아래 남자 후배들 몇은 그들만의 '아빠 어디 가'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고 들었다. 아빠들도 신나고 아이들도 신나는 모임이라고 했다. 엄마들은 더 신난다고 했다.
그런 움직임들이 모이고 쌓이면, 사회의 그림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 시대의 노예들은 아고라에 나올 기회가 없었지만 우리에겐 스티브 잡스가 우리에게 주고 간 아이폰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행히도 한계를 긋는 문장으로 노예제에 나름의 비판을 가한다.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강자들에 의해, 무력에 의해 노예가 되어 있는 상황을 비판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가 아닌 사람을 찾기가 오히려 힘들긴 하지만,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사회적 관습에 의해 약자가 되어 노예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런 어쭙잖은 글을 쓰는 것도, 미약하나마 따뜻한 사람들의 연대에 힘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건 늘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현상태를 뒤집어 왔던 학문이다.
내 글은 무거운 질문을 힘 있게 던지는 글은 못 되지만, 내 글이 임신과 출산과 육아라는 주제에 대해 누군가에게 조그맣게라도 생각거리를 주고 1초라도 울림을 준다면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부지한테 가서 자랑해야지.
따뜻한 사람들의 연대.
같이 하고는 싶지만 뭔가 거창하고 복잡하게 들린다면, 일단 웃어주는 건 어떨까.
혼자서 한 살 반 짜리 아이를 데리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를 탄 적이 있다.
어른도 지겨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국민체조라도 하고 싶은 (자꾸 옛날 사람 인증) 12시간의 비행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지루했을까. 얌전히 놀던 아이는 결국 비행기에서 내리자고, 문 열고 나가자고 (응?) 엄마에게 건의하다가 급기야 떼를 쓰기 시작했다. 황급히 아이를 안고 사람들이 없는 통로로 도망치려는 찰나, 근처의 노부부가 아이에게 젤리를 쥐어주고 (줘도 되냐고 물으시면서, 우는 아이들에게 주려고 비행기를 탈 땐 늘 작은 젤리 봉지들을 주머니에 챙기신다고 했다(!). 그럼요 그럼요. 저한테도 주셔도 됩니다.) 나에게 빙긋이 웃으며 “It’s all right. We all have been there.(괜찮아요. 우리도 다 지나온 과정인 걸요.)”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아아.
아이에게 웃어주는 어른을 만나면, 불안한 엄마들의 마음에는 조그만 환한 불이 켜진다.
옆자리에서 칭얼대는 아이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짜증 섞인 시선 대신 조용히 배려를 담은 미소를 보내는 것.
이 미소들이 쌓이면 그 문화는, 그 사회는, 반드시 조금씩 변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순간들이 너무나 힘든 엄마들이 있다면, 다음의 말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때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우리 두 꼬마들은 이제 엄마가 바쁠 때 풍선 하나만 후욱 불어 줘도 둘이서 한참을 낄낄거리며 놀 정도로 업그레이드되었답니다.
다시 좋은 날은 오더이다. 조금만 힘내세요.
그 길에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을 얹어줄 겁니다.
먼저 지나갔다고 토끼처럼 드러누워 낮잠 자지 않고 작은 목소리, 응원의 미소, 더 낫게 만들 궁리, 이런 것들을 길 위에 끊임없이 얹을 거예요.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