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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무 Apr 05. 2024

엄마 하고 울어도 되나?

12살 여름.

집에서 벽에 걸린 나무거울을 만지다 발등에 거울이 떨어졌다.


찢어진 발등을 치료받기 위해 응급실로 향했다.

부러진 곳은 없지만 찢어진 상처를 꿰매야 한다고 했다.


작은 수술이지만, 나름 태어나 받는 첫 수술이었다. 마취를 하기도 전에 응급실이 떠나가라 울 준비를 마친 나는 수술이 시작되자 곧장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마"하고 한 번 크게 울고 나니

갑자기 병원에 있던 사람들과 아빠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 이혼했는데)

(아빠가 엄마 싫어하는데)


엄마 하고 우는 것이 괜스레 눈치 보이고 이상해서 울음소리를 바꿔야만 할 것 같았다. 다시 엄마 하고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짧은 찰나에 나의 다음 울음을 어떻게 뱉어야 할지 빠르게 결정해야 했다.



울음은 인간의 발음을 어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엄마”하고 외치되 최대한 발음을 뭉개어 사람들이 그것이 차마 ”엄마“라는 것을 못 알아차리게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의 청각과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뛰어나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해당 옵션을 버렸다.


그다음, “엄마”라는 대상을 부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를 대체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후보군으로는 “아빠“와 응급실에 함께 와준 “고모”가 있었다.


그런데 아빠를 외치는 것은 왠지 내가 이혼 가정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그리고 설령 그렇게 생각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어린 마음의 그땐 그랬다.

아무튼 그럴 바엔 고모를 특별히 좋아하여, 울 때도 눈앞의 고모를 먼저 찾는 아이가 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나의 울음은 “고모”가 되었다.

“고모”

“고모”

하고 몇 번을 울고 나니 참을 수 없는 어색함과 이상함이 몰려왔다.


(누가 이렇게 울어? 이게 뭐야 너무 이상해.)


그러곤 울음을 금세 그쳤다. 차라리 아픔을 조금 더 참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뱉는 것은 울음이다.

울음은 인간의 삶에서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며 대게 “엄마”를 울부짖는 것은 엄마도 그만큼 아이의 삶에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건 이후로 나는 평생 소리 내어 울지 않겠노라, 적어도 누군가를 부르짖으면 울지는 않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 어린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엄마 하고 울어도 된다고.




이혼 가정 자녀로서 겪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면에서는 지진과도 같았던 큰 혼란은 대부분 위와 같은 사소한 사건들이다.

사람의 본능인 울음조차 부모의 관계로 인해 고민해야 하는 상황과 그런 마음에 상처받는 그런 사건들 말이다.


그동안은 너무나 별거 아닌 작은 일이라 속으로만 쌓아뒀더랬다.

누군가 나처럼 속으로 썩히고 있다면, 이혼 가정의 자식 그거 별거 아니라고, 별거 아니니까 마음껏 자신이 겪은 일과 그때의 감정이나 고민들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고 이야기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 자신을 위해,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의 별거 아닌 이 글이 그걸 돕는 장이 됐으면 한다. 때로는 누군가 테이블 위에 꺼내놓은 자신의 경험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아무개에게 큰 도움과 위로가 될 수가 있으니.


당신이 겪은 이혼자녀로서의 사소한 마음의 지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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