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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 Sep 21. 2021

여행지의 방

익숙함이 비좁음을 덮어버린 시공간


  특별하지 않아서 오히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행지의 방이 있다. 근사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은 클래식했던 것도 같고, 침대 하나로 꽉 들어차서 두 명이 묵기에는 비좁았던 방. 그때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쩐지 떠나온 뒤에 잔잔하게 생각나던 곳. 캐리어를 활짝 펼쳐놓을 공간이 없어서 가방을 반쯤 접은 채로 손을 넣어 휘적거리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침대와 창가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야 했던 방.


  여행지의 방에 처음 발을 들인 날, 대개는 그 도시에 처음 떨어진 늦은 밤인 경우가 많았다. 공항의 자동문을 나서면서부터 그 도시의 밤을 가로질러 숙소에 무사히 찾아가기까지의 여정은, 잔뜩 긴장한 탓에 짐가방이 무거운 것 마저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낯선 도시의 불친절함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 시간은 전체 여행을 통틀어 그 도시와 가장 낯선 관계에 놓인 시간이다.


  그때의 방은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다. 도착의 들뜬 기분을 절로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밤의 음울함과, 굳게 닫혀있던 문 안으로 머금고 있던 텁텁하고 정체된 공기가 방의 첫인상이다. 방은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우리가 찾는 것마다 어딘가에 꼭꼭 숨겨놓고서 낯을 가린다. 비좁은 방안에 테트리스하듯 캐리어를 포개 놓고 이리저리 뚜껑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서울에서 데려온 일상을 옮겨심느라 분주하다. 새로 장만한 반짝이는 물건들 대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집에서 급히 주워 담은 것들, 짐가방에 딸려온 생활의 부속들을 여기저기 늘어놓고서야 안도하며 새벽에 잠에 든다.


  하지만 자고 난 새에 이 방은 어젯밤과는 다른 공간이 되어있다. 베개에 얼굴을 부비고 뒤척이며 방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사이에 금세 정이 들어 익숙함이 불편함과 비좁음을 덮어버렸다. 여행지의 방은 그런 신기한 시공간이다. 무언가와 친해지는데 필요한 시간을 낯선 곳에서 발휘되는 적응력으로 모두 뛰어넘어버리는 공간이다. 여행지의 방에서는 아직 새벽의 푸르름이 남아있는 이른 아침에 꼭 잠을 깨어서, 커튼을 젖히고 도시의 놀라운 얼굴을 처음으로 만난다. 여행자를 안도케 하는 아침의 밝은 빛이 방 안에 들고, 간밤의 뒤척임으로 돌돌 말려서 엉뚱한 곳에 처박혀있는 이불과 곳곳에 남아있는 어젯밤 도착의 흔적들을 발견하고는 익숙함과 친밀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방에는 여느 호텔방에 깔려있을 법한 모가 짧은 카펫 대신에 약간 휘고 뒤틀어져 있었던 커다란 널의 나무 바닥이 깔려있었다. 퍽 세련된 느낌은 아닌 애매한 민트색의 잔무늬 벽지가 발라져 있었고, 지그재그 나무다리를 가진 클래식한 벽부등 두 개가 달려있었다. 붉은빛이 살짝 도는 깊은 나무색의 침대 헤드는 지난밤의 흔적으로 잔주름이 가득 져있는 흰 침대보를 어떤 소설 속의 순간처럼 보이게 했다. 전신 거울이 없어서 옷장문 안쪽에 달린 거울을 찾아내어 문을 열고 매일매일의 옷 입은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이 작은 호텔방에서였다. 그때쯤이면 아주 커다랗지는 않았던 소소한 불편함들이 밉지 않게 되고, 아담한 방의 크기마저도 클래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방을 나서면 안이 짙은 초록색으로 칠해진 작고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창가에 옹기종기 식물이 놓여있던 계단실을 지나야 했다. 복도에서 이어진 계단을 따라 직조가 쫀쫀한 카펫이 깔려있었다. 창턱에는 토분에 담긴 작은 식물들이 놓였다. 벤치 위에는 근사한 식물 패턴을 모아둔 책 한 권을 편 채로 놓아두었다. 나무로 된 계단 난간은 손을 많이 타서 그런지 색이 깊고 매끈했다. 금테가 둘러진 그림들과 뿔이 달린 물소 머리가 벽에 걸려있었고, 방에 있는 것과 꼭 같은 벽부등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복도와 계단실이 노랗게 빛났다. 돌아온 이후에 더욱 잔잔하게 생각이 나던 어떤 여행지의 방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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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의 방,

Hotel Alexandra,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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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행지의 방의 기록들 :
- 방을 여행하는 시간들
- 피렌체의 셋방
- 집과 호텔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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