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의 끝에서 마주한 나

감정을 가둔 방에서 나를 꺼내다

by 무명이

나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항상 시작과 끝이 어렵다. 1년 만에 다시 이렇게 글을 남긴다. 예전에 썼던 글들은 읽기조차 싫어 모두 지워버렸는데, 또다시 무슨 마음으로 여기에 끄적이려는 걸까.

이번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나를 위로해 주는 글을 남겨보려 한다. 꾸미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매일 조금씩 나에게 집중하는 글을.


한국으로 돌아온 지 4년째. 생계를 위해 일은 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은 점점 사그라지고 ‘눈치’만 늘어가는 요즘이다. 누구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니면서, 회사와 가족, 친구를 핑계로 나 자신을 뒤로 미뤄왔다. 회사에서는 월급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만, 가족에게는 죄책감이 들지 않을 만큼만, 친구들에게는 외롭지 않을 만큼만 나를 드러내며 살았다.


지난 금요일, 테라스에서 혼자 차를 마시다가 문득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세상을 뒤흔드는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이 쏟아졌고,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복받쳐 올랐다. 가족도, 친구도, 회사도 아닌 무시해왔던 ‘나’가 터져 나온 것 같았다. 반나절을 울고 나니 눈이 퉁퉁 부었지만,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정신 차려” 하고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만들어놓은 이상적인 모습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았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 뒤에 숨어 진심을 억눌렀다. 싫어도 웃으며, 눈치 보며, 밝은 척하며. 세상 긍정적인 사람인 척하면서 말이다.

어릴 때부터 “웃으면 복이 온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에 길들여져, 슬픔은 감춰야 한다고 믿었다. 누가 봐도 밝고 복 많은 여자처럼 보이고 싶었고, 나 스스로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내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을 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실에 방문을 닫고 울면서도 화장하고 다시 웃는 척했다. 그런 ‘척’이 쌓여 나를 가두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슬픈 순간에도 웃음을 흉내 내야만 했다. 눈치 보여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나. 괜한 ‘신데렐라 컴플렉스’에 걸려 착하고 밝은 척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서글프다.

이제는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감정에 솔직하게 살아가고 싶다.


외국계 회사의 임원으로 일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상처도 위로도 받으며 살아왔다. 겉보기엔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처럼 보이겠지만, 그 속에는 늘 감정을 억누르는 나가 있었다. 영업 실적을 위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웃고, 비위를 맞추며 수십억짜리 계약을 따낸들, 그 성과금이 내 상한 마음을 치유해 줄 수 있을까?

돈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이 정말 ‘어른이 되는 과정’일까?


사회생활 17년 차, 이제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도 멋지게 거절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윗사람에게도 당당히 ‘No’라고 말할 줄 아는 후배들을 보면 부럽다.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누구를 위해 이렇게 충성하며 나를 희생해왔을까.


서른여덟의 나이, 혼자 살고 있고, 남자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꾸미지도 않는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가끔 스치듯 찾아오는 외로움은 그저 삶의 한 부분일 뿐, 결코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연애도 많이 해봤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결핍해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문득 깨닫는다. 왜 30대 후반이 된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유부남들일까.

그들의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가정이 있으면서도 혼자인 여자를 찾는 그 묘한 자기합리화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아"

"와이프는 그냥 전우같은 사이야"

"너도 결혼해봐 내가 한 애기가 무슨 뜻인지 다 알게될꺼야"

마치 오래된 대본이라도 있는 듯, 대사와 타이밍까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가정이라는 성(城)을 굳게 지켜놓은 채, 그 성벽 밖에서 ‘특별한 사람’을 찾는 그들의 태도에는 묘한 익숙함과 계산이 깃들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을 ‘책임 있는 가장’으로 포장하면서도, 정작 감정의 경계는 자기합리화라는 안개로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들의 말은 우아한 듯 들리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허술한 시(詩) 같고, 어딘가 익숙한 복붙 문장 같다. ‘가정’이라는 단어는 늘 면죄부처럼 문장 맨 앞에 세워지고, 그 뒤에 따라오는 감정은 꼭 합리화의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다.

나는 그 리본을 손에 쥐고 멋쩍은 미소로 대화를 넘긴다. 속으로는 “또 시작이군” 하면서도,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침묵의 순간, 마음 한켠에 씁쓸함이 잔잔히 가라앉는다.

그들의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나는 그들이 쳐놓은 ‘성(城)’ 밖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지도, 될 생각도 애초부터 없었다.

그들이 정성스레 두른 말의 리본과 합리화의 안개는, 사실 그들만의 가두리 양식장에 불과하다. 스스로 쳐놓은 경계 안에서 ‘너는 특별하다’는 미끼를 던지며, 마치 내가 자발적으로 그 안으로 헤엄쳐 들어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나는 그물이 쳐진 수면 위에 잠시 스쳐간 바람일 뿐이다.

그들의 틀 안에 들어간 적도, 들어갈 생각도 없다. 그들의 ‘특별함’은 결국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고, 나는 그 무대 위에서 들러리 역할을 할 생각이 없다.


2년 전 비건으로 살기로 결심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과 분위기에 휩쓸려 회식 자리에서 먹고 싶지 않은 고기를 억지로 먹고, 마시고 싶지 않은 술잔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수없이 ‘괜찮지 않다’고 외치면서도, 겉으로는 늘 ‘괜찮다’고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지키려 한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거나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을 부드럽고 단단하게 표현할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저는 고기를 먹지 않아요. 유제품도 괜찮습니다, 괜히 준비 안 해주셔도 돼요.”
“술은 괜찮습니다. 저 오늘은 안 마실게요.”

말끝을 흐리거나 웃음으로 감추지 않고, 나를 위해 정중하게 ‘선’을 긋는 것. 그것이 누군가를 거절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방식임을 이제는 안다.

눈치를 보며 분위기에 자신을 맞추던 지난 시간을 떠나, 앞으로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나의 선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나’에게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려 한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나의 일부다.

남의 시선을 따라 사는 신데렐라 같은 삶은 개나 줘버리고, 나의 감정과 나의 삶을 나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오랜 시간 가둬두었던 나를, 이제는 조금씩 꺼내어 진짜 나로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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