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의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어나 볼래? 놀라지 말고 일어나.
새벽 두 시, 남편이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영문을 모른 채 눈을 뜬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걸칠 옷을 찾았다.
“윗집에 불이 났어. 그래서 지금 밖으로 나가야 해.”
"불? 불이라고요? 아… 어떡해."
"괜찮아. 침착하게 놀라지 말고. 자 천천히 나가자. 응?"
세상에, 불이라니! 불이 났는데 어떻게 침착하라는 거야. 평소에는 토끼처럼 잘 놀라는 사람이 너무 차분하게 나를 다독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재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火事です。火事です。」
화재입니다. 화재입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경보 알람 소리는 점점 커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맨션(일본에서는 아파트 형태의 건물을 보통 맨션이라 부른다) 뿐 아니라 소방서에서도 화재 안내방송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불이라니.”
무얼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허둥지둥 마음만 급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놀라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 우선 휴대폰이랑 옷 챙기고.”
남편은 화재진압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따뜻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섰다.
아파트 복도에 나오자 매운 연기가 코를 찔렀다. 연기는 확실히 위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이 맨션 건물에는 한 층에 세 가구가 살고 있다. 우리 집을 가운데로 양 옆에는 젊은 일본인 부부가, 오른쪽에는 미국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에 놀란 미국인 부부 리아와 데이비드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Oh my God!"
일본어가 서툰 그들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두 배는 커졌다. 나와 남편은 건물에 불이 난 것 같으니 어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잠시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겉옷을 걸치고 나왔다. 우리는 일제히 계단으로 향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무조건 계단을 이용해 탈출해야 한다고 화재 대피 훈련 때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10년 넘게 회사를 다니면서 수차례 민방위 훈련에 참가했다. 탈출구 확보, 전기 제품 전원 차단, 자세를 낮추고 젖은 수건으로 코와 입을 보호하기, 상황 판단 없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 않기, 건물 구조에 익숙한 사람의 안내에 따르기, 비상계단을 이용한 저층으로 이동하기, 아래층 대피가 불가할 때는 옥상에서 바람을 등기고 대피하기 등등. 만약 나에게 위기상황이 닥치면, 난 이것들을 잘 기억해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훈련 때마다 소방차, 소방관, 뿌연 연기, 사다리 등 실제 상황과 유사한 환경에서 몇 번이고 화재 훈련을 했다. 하지만, 훈련은 연출된 상황임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지금처럼 무섭거나 떨린 적은 없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서바이벌 게임' 같은 생각이 들 때도 들었다.
슬프게도, 지금은 다르다. 실제 상황은 완벽하게 달랐다. 무엇보다 내 것이 아닌 듯 제멋대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7층에 불이 났대요.”
계단에서 내려오던 누군가 말했다. 7층, 8층, 9층 위층에 사는 주민들은 이미 채비를 마치고 계단으로 대피하는 중이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다리가 대책 없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민방위 훈련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훈련을 하며 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다음 씬을 알려주지 않는 시나리오였다. 뒤를 바짝 따르던 리아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남편 데이비드가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리아는 급기야 아이처럼 훌쩍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렇게 2분도 안되어 우리는 신속하게 1층 로비까지 내려왔다. 1층에 도착했을 때 소방관들이 우리를 맞았다.
일본의 소방관을 이렇게 가까이 보게 될 줄이야. 도로를 가로지르며 긴급하게 출동하는 소방차 안의 그들을 본 적은 있지만, 타국의 소방관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날 일이 또 생기다니! 떨리지만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우리는 우르르 이동했다.
언젠가 미국 워싱턴주의 한 소방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소방시설을 둘러보고 현지 소방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근 농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현장으로 출동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 차를 마시며 농담도 하던 이들이 화재 알림 소리에 눈빛이 변해 얼마나 무섭게 뛰어가던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찰나.
잠깐 여기 있어.
갑자기 남편이 내려왔던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어디 가는 거야? 위험하게 얼른 와요."
소리쳤지만, 걱정 말라고 하며 남편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소방관인 동생에게 ‘불이 나면 자기 힘으로 뭘 해보려는 어설픈 시도는 절대 하지 말라’는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런 탓에 남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왜 저러는 거야. 빨리 와요. 빨리 이이……."
애가 탔다. 소방관들이 있는데 자기가 뭘 하겠다고 올라가는 거야.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건물 입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몇 분 후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5층에 사시는데 평소에 지팡이를 짚고 집 앞에 쓰레기 처리장까지 힘들게 나오신다고 언젠가 남편이 말했던 그분이었다. 남편은 할머니가 혼자서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걱정되어 다시 올라갔던 것이었다. 아… 그래서 올라간 거야. 나를 보고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근처에 있던 소방관 한 명이 재빨리 할머니를 구급차로 모셨다. 할머니를 제외한 다른 주민은 모두 아파트 앞의 광장으로 모였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덴샤(전차, 電車) 역과 바로 이어져 있었는데, 소방관들은 역 광장으로 주민들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우리보다 먼저 대피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이사 온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여태껏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같은 층에 사는 두 부부와 이따금 자전거를 타고 엘리베이터에 타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전부였다. 본의 아니게 한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광장에서 불이 난 쪽을 바라보았다. 불이 난 곳은 건물의 7층, 바로 우리 집의 위층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화염은 컸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연기가 솟구쳤고 기분 나쁜 냄새가 퍼졌다. 소방관들은 소방호스를 들고 건물을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이 난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는데 주변은 이상하리 만큼 너무 조용했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은 네 사람이 전부였다. 바로 외국인 두 커플이었다. 한국에서 온 나와 남편, 그리고 옆집의 리아와 데이비드였다. 넷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소방관들이 광장에 넓게 편 방한(防寒) 포장 위에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언제 나눠준 건지 방한용 은박으로 된 블랭킷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5월의 봄이었지만 새벽의 공기는 쌀쌀했다. 갑자기 한기가 들면서 몸이 바르르 떨렸다. 옆집에 사는 일본인 부부는 은박으로 된 블랭킷 외에도 집에서 챙겨 온 무릎담요와 패딩 점퍼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갑까지 챙겨 왔는지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를 사 왔다. 마치 한여름밤 하나비(花火, 불꽃놀이)를 감상하는 이들처럼 여유로웠다.
이렇게 정신없는데
언제 지갑까지 챙길 생각을 했지?
그러고 보니 이들 부부 만이 아니었다. 다른 주민들 역시 따뜻한 캔음료나 생수병을 들고 있었다. 바닥에 앉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은 이방인 넷 뿐이었다.
"혹시 주머니에 동전이라도 있어요?"
체온이 떨어져 추위가 심해진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그토록 간절히 따뜻한 무언가를 마시고 싶은 적은 없었다. 남편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던 커플도 마찬가지였다. 리아 역시 데이비드 품에 안겨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이 지났다. 불이 완벽하게 꺼질 때까지 시끄럽게 울려대던 화재 안내 방송이 그쳤다.
"이제 올라가셔도 좋습니다."
소방관의 외침에 사람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을 떨었던 탓에 모두들 지친 얼굴이었다. 남편과 나도 계단으로 향했다.
"죄송하지만, 여기 602호 주민 계세요?"
추위에 땡땡해진 몸을 웅크리고 걸어가는데 누군가 우리를 찾았다.
소방관이 찾는 건 바로 우리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화재의 직접적인 피해는 아니지만, 불을 끄는 과정에서 뿌린 엄청난 물로 인해 바로 아래층인 우리 집에도 피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정말 욕실과 화장실을 들어가는 복도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급한 대로 가지고 있는 수건으로 천장의 물을 닦았다. 가전기기들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플러그를 뽑고 기기들을 천으로 덮었다. 수북하게 쌓인 수건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불이 빨리 꺼져서 다행이지? 다른 집으로 번지지 않은 게 어디야?"
남편이 지쳐있는 나를 위로했다.
“그래, 불 난 집도 있는데. 이것도 감사하지.”
몇 분후 누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조금 전 602호 주민을 찾던 소방관이었다.
"일단 지금은 큰 피해가 없지만, 혹시라도 내일까지 물이 계속 새거나 다른 피해가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는 소방서 연락처를 내밀었다. 남편과 나는 전화번호를 받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철썩' 소파에 앉자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따뜻한 차 한 잔 줄까?"
남편과 나는 한국 슈퍼에서 산 귀한 '유자차'를 끓였다. '호로록' 따뜻한 차 한 모금에 추위와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했다.
"근데 오빠, 아까 일본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차분해요? 오두방정 떠는 건 나랑 리아뿐이었나 봐."
위기의 순간에 어쩜 그렇게 차분하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집을 나왔는지 그들의 침착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는 블랭킷, 차키, 지갑은 물론 평소 먹는 약과 여권까지 들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재난훈련에 익숙해진 덕분일까!
그저 남편과 나의 안전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나와 달리, 그들은 위급한 상황에 필요한 것들을 침착하게 챙겨 탈출했다. 평소 위기에 강하다고 자부했었는데… 부끄러웠다.
‘삐오삐오!’
“우회전합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새벽 2시 모두가 고요히 잠든 시각, 맨션 앞 길에서 구급차의 바쁜 소리가 들린다. 집 근처에 인근에서 가장 큰 병원이 있어 본의 아니게 밤낮 다급한 구급차 소리를 듣게 된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구급차의 비상 알림은 쩌렁쩌렁하게 6층까지 올라온다.
창문을 살짝 열어 빼꼼히 밖을 내다보다 문득 불이 난 그 새벽이 생각난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남편도 없이 혼자 겪는 상황이래도 침착하게 잘 대응할까? 적어도 추위에 고생한 탓인지, 다른 건 몰라도 따뜻한 외투와 지갑은 반드시 챙길 듯하다. 하지만, 불길이 치솟고 있는 건물로 다시 돌아가는 남편을 보낼 수 있을까! “어서 할머니 모시고 내려와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라고는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여전히 자신이 없다. 화재현장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시나리오니까.
구급차 소리가 서서히 멀어진다. 어려서 함께 타던 자전거보다 몇십 배는 큰 소방차를 운전하고, 소방호스를 어깨에 메고, 얼굴은 땀에 흠뻑 젖고… 지금도 간절한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동생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마음이 시끄럽다.
[대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