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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Sep 17. 2021

밤(栗)의 세계에 승자가 있을까!

나는 어떤 밤일까?

밤 따러 갈래?
오백엔 내면 마음껏 주워올 수 있대


요즘 매일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언니(M)가 말했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 쐬며 산책도 할 겸 흔쾌히 가겠다고 대답했다. 목적지는 도쿄도 아키루노시(東京都あきる野市舘谷台). 건물 많고 복잡한 도쿄의 도심과 달리,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다. 평소 근처까지 등산을 하러 간 적은 있지만, 이렇게 단출한 차림으로 집을 나선 건  처음이다. 가벼운 바지와 셔츠, 모자와 작은 가방 하나를 매고 집을 나섰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어 비가 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하늘은 적당히 흐렸다. 목적지까지는 덴샤(電車)를 세 번 갈아타야 했다. 세 번째 역인 하지이마(拝島駅)에서 눈앞에서 덴샤를 보냈다. 그 대가로 의자에 앉아 40분을 기다려야 했다. 평일인데 배차 간격이 이렇게 클 수가! 집을 나선 지 두 시간 만에 무사시이츠카이치역(武蔵五日市駅)에 도착했다.


어렵게 도착한 무사시이츠카이치역. 역사(駅舎)는 오래된 박물관에 들어온 듯 운치 있었다. 지루했던 여정의 피로가 싹 가셨다. 잔잔한 조명과 나무로 장식된 벽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산이 가까워서일까. 벌써부터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밤나무가 있는 곳까지는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운동도 할 겸 걷자! 지도가 알려주는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길을 걸을 땐 엔도르핀이 주체할 수 없이 솟구치는 나란 사람. 눈앞에 보이는 생경한 풍경에 발은 이미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역에서 멀어질수록 오가는 사람 한 명 볼 수 없었다. 흔한 자전거 한 대 지나가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정치인들의 큼지막한 얼굴이 마을 입구의 어울리지 않게 붙어 있었다. 100미터를 걷는 동안 겨우 서너 대의 자동차만 지나갈 뿐이었다. 그래도 이곳, 행정구역 상으로는 도쿄도인데.


1990년 건설했다는 오래된 터널을 지나자 약간의 경사가 있는 언덕길이 나왔다. 아키가와교(秋川橋)라 이름이 붙은 다리가 나왔다. 다리 아래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제법 흐르고 있었다. 물줄기를 따라 듬성듬성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기 봐요. 사람이 있어요~오. 사람이 보여~요~오오~”

신이 난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흥얼거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래에 남편은 크게 웃었다.

“그건 무슨 노래야? 지금 지은 거야?”

그냥 기분이 좋았다. 신나게 팔을 흔들며 10여분을 걷자, 언덕의 끝이 보였다. 멀리 보이는 간판 하나! 큼지막하게 ‘밤(栗)’이라고 쓰여 있었다. 도착했구나!




“자, 그럼 본격적으로 주워볼까?”

밤송이를 잘 까는 방법까지 유튜브에서 검색했다는 남편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간판 가까이 도착하니, 밤나무가 있는 곳은 도로가에 있는 작은 밭이었다.


“어머, 산이 아니네. 밤밭이에요.”

먼저 도착한 언니와 일행은 벌써 밤을 줍고 있었다. 밭 입구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500엔만 내면 마음껏 주워갈 수 있다고? 그런데 밤나무는 많아야 10그루 남짓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좀 늦었죠!”

손을 들고 인사를 하자, 밤을 줍고 있던 언니가 일어나며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밤이 너무 작아. 한창때가 아니래. 지금 끝물이라서 주울 게 없어.”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한 손에는 집게를, 다른 한 손에는 밤이 든 봉지를 들고 선 언니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언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밤 따기-정확히 말하면 줍기에 가깝지만-체험장 치고는 밤이 너무 없었다. 바닥에 수북한 빈 밤송이를 보니, 다 파한 장터에 온 것 같았다. 배낭 하나씩 매고서 가방에 가득 담아 오겠다고 의기양양했던 나와 남편의 꼴이 우스웠다.


“너흰 그냥 안 줍는 게 나을 것 같아. 우리가 이미 주운 거 있으니 좀 나눠줄게. 어차피 가져갈 만한 게 없어.”

밭주인은 나와 남편은 밤을 안 주울 거라고 하자 조금 실망한 얼굴이었다.

“밤이 많이 없으니까… 피크가 지났어요. 일주일 전에만 왔어도 좋았을 텐데. 뭐… 괜찮아요. 그러니까, 두 사람은 체험을 안 한다는 거죠?”

괜찮다고 하면서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물었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은 걸 씁쓸한 얼굴이 다 말해 주었다.


굵고 튼실한 밤은 없었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밤송이에는 작은 밤들이 제법 차 있었다. 이 밤만 모두 주워도 10kg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근데 정말 줍는 만큼 다 가져갈 수 있다고요?”

언니에게 물었다. 아무리 최상급의 밤이 아니지만, 마음껏 주워가게 한다면 이윤이 남을까. 궁금하던 찰나, 할아버지가 바구니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대나무로 만든 작은 바구니에는 빨간 그물망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주운 밤은 이 그물망에 넣으세요. 망은 한 사람 당 한 개입니다. 그 이상은 가져가면 안 돼요.”

할아버지는 단호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주운만큼 가져가게 할리가 없었다. 얼마 전 슈퍼에서 본 작은 밤 한 꾸러미의 가격이 9백 엔을 넘었던 게 생각났다.


밭주인의 말에 일행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각자 들고 있는 비닐봉지마다 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양은 빨간 망에 넣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열심히 주운 밤을 가져가지 못하면 아까워서 어쩌지.” “처음부터 제대로 알려줬어야지, 속았네.”라며 목소리를 혀를 차기도 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하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이 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남은 밤 여기에 두면 다 썩을 텐데…….”

“그러게. 이거 바로 썩지. 팔 수 있을 정도로 큰 것도 아니고. 이렇게 작은 것들 뿐인데.”

눈치 백 단인 주인 할아버지. 한국말을 알아듣는 걸까!

대화에 끼어들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남은 건 여기에 두고 우리가 팔면 되니까.”

남은 밤은 도저히 상품으로 내놓을 만한 상태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할아버지는 단호했다.


“휴… 아쉽지만, 우리 욕심내지 말고 그냥 정량만 들고 가요.”

“자, 자, 좋은 걸로 골라 담아 봅시다.”

모두 밭주인이 펴놓은 작은 돗자리 위에 주워온 밤을 쏟아부었다. 한 사람씩 빨간 망을 들고 밤을 고르기 시작했다. 크고 예쁜 밤과 작고 못생긴 밤은 나눠졌다. 짙고 선명한 밤색-밤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에 땡글땡글 윤기가 흐르는 큰 것들만 골라 담았다. 가만히 보니 골라진 것은 밤송이의 가운데에 있었던 녀석들이었다.


쭈그린 채 밤을 고르느라 분주한 손을 보니, 한쪽으로 밀려난 남겨진 밤들이 눈에 밟혔다. 어디선가 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두 녀석 사이에 껴서 자라느라 얼마나 비좁고 힘들었는데요. 이렇게라도 선택받아서 참 다행이에요. 전 바랄 게 없어요.”
망으로 들어가는 밤들이 말했다.
“안 그래도 가운데 있는 녀석에게 밀려 늘 밤 껍데기에 늘 온몸이 눌려 있었는데. 여기서 또 밀려나다니, 너무 억울해요 전!”
남겨진 밤 역시 아우성이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밤송이 안에서 수개월을 동거 동락했던 형제들이 생이별을 하게 되었지만 모두 데려갈 순 없잖아! 어쩌면, 밤송이가 벌어질 때부터 밤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았을지 모른다. 곧 헤어질게 될 거라는 걸.


밭에는 앞서 다녀간 사람들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밤들이 가득했다. 벌레가 먹어서, 썩어서, 너무 작아서, 덜 익어서. 공통된 이유는 하나였다. 야무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


탄탄하고 탱글탱글한 소수의 밤과 달리 밤나무 밑에 남겨진 이 많은 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벌레가 가득 꼬여 반 이상이 썩은 밤을 보았다. 이미 밤의 모양이 아니었다. 가만히 밤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밭을 떠날 수 있는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은 다시 부활할 것이다.


남은 가을과 겨울 동안 눈비를 맞고 땅이 얼고 녹기를 몇 번 반복하면 몸이 으스러져 땅 속으로 들어가겠지. 그리고 태어난 나무의 뿌리를 찾아 그 속으로 들어가겠지. 다시 봄이 되면 밤꽃이 피고, 다시 밤송이가 열려 그 안에서 작은 알밤이 열릴 테고. “이번에는 꼭 튼튼한 밤이 될 거야.” 멋진 꿈을 꾸며 가시 돋친 밤송이 안에서 꼬물꼬물 인고의 시간을 보낼 거야.
또 알아? 어떤 밤은 산 짐승이 데려갈지도 몰라. 동물의 신비한 뱃속을 며칠 동안 여행하다 '응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들어가겠지? 땅 속에서 만난 도라지 뿌리를 타고 올라가 보라색 꽃으로 피어날지도 몰라. 산새의 노래에 잠을 깨고 이슬방울과 친구도 될 거야.


남겨두고 온 밤이 더 이상 가엾지 않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곳이었어. 겨울이라서 빈 가지만 있는 나무 사이로 걷고 있었는데 눈 손에서 뭔가 반짝이는 거야. 가까이 가보니 글쎄, 눈 속에 땡글땡글한 밤이 있지 않겠니? 여태까지 본 적 없는 크고 딴딴한 밤이었는데, 상처 하나 없이 얼마나 깨끗하던지. 이렇게 예쁜 밤은 처음 봤어. 밤이 너무 예뻐서 손에 주워 담았는데. 그러다 잠이 깼지 뭐니.


언젠가 엄마에게 들은 태몽 이야기다. 세상에, 난 밤이었다. 난 어떤 밤일까! 누구나 탐 내고 데려가고 싶은 밤일까. 아니면 튼튼하고 예쁜 밤으로 태어나는 꿈을 꾸며 겨울을 준비하는 남겨진 밤일까.


달콤한 향기도 보드라운 육질도 없이, 따갑고 무서운 가시 속에서 자라지만, 빈틈없이 꽉 찬 밤이 되고 싶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하얀 알맹이. 생으로 먹으면 '오도독오도독' 달콤한 즙이 입안에 가득 고이고, 쪄 먹으면 포슬포슬하고 노란 과실에 또 한 번 기가 막힌. 어떻게 먹어도 맛있고 실망시키지 않는 밤. 내 태몽이 밤이라고 이토록 미화하는 건 아니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과일은 아니지만, 쉽게 물리지 않고 자주 생각나는 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 메뉴는 정해졌다!

찐 밤이다! 

포슬포슬 달달한 밤이다. 

 :)


▲ 예쁜 알밤만 골라서 한 바구니 소복하게 담았다.
▲ 밭 한쪽에서 자라고 있는 부추(정구지, 솔, リラ, 세우리*)    *부추의 제주도 방언은 '세우리'라 한다.
▲ 허리에 두르고 밤을 주워 담는 바구니란다. 한 번 메 볼걸…….
▲ 작고 동글동글 귀여운 밤
▲ 아쉽지만, 녀석들은 남겨졌다. 도라지꽃으로 피어나야 해. 꼭!
▲ 이 간판을 보고 얼마나 설렜던지! 간판에도 "밤 따기"가 아닌 "밤 줍기가 가능하다"라고 적혀있다.
▲ 알밤을 떠나 보낸 밤송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 1990년에 만들어졌다는 터널
▲ 버스 모양으로 장식된 자판기, 참새 기사가 운전하고 있다. 자동차 경적은 '짹짹'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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