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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Sep 10. 2021

#10. 놓치고 싶지 않은 소리

김기택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몇 해 전의 일이다.     


“오늘은 지구의 날입니다. 4월 22일 밤 8시에 실시하는 ‘온 국민 10분간 불 끄기 캠페인’에 직원 여러분 모두 참여해 주세요. 딱 10분입니다.”   

 

아침에도 이 안내 방송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흘려버리고 말았다. 저녁 7시 40분 즈음이 되자 5분 간격으로 다시 방송이 나왔다.     


“아… 이 바쁜 때 10분이나? 꼭 꺼야 돼? 아 진짜…….”     


당장 보고해야 할 자료가 쌓여있는 동료는 결국 짜증을 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함께 애써온 터라,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번거롭겠지만, 우리 동참합시다. 잠깐 소등하고 10분만 쉬어요.”     


과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럴까요? 우리 10분만 쉽시다.”     

다른 동료가 사무실 가운데 놓여있는 회의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우리는 하나, 둘씩 무거운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뻐근한 어깨를 천장으로 ‘쭈욱’ 뻗으며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57초, 58초, 59초 땡! 끌게요!   


과의 막내 직원이 웃으며 전등을 껐다.      

온 건물이 순간 껌껌해졌다. 우리 사무실은 건물의 18층, 꽤 높은 곳에 위치한 덕분에 시야가 뻥 뚫렸다.      

늦은 시각까지 불이 꺼지지 않던 길 건너 박물관의 외벽 조명도 일제히 사라졌다.  

  

“우와! 이거 기가 막히네요.”     

창밖을 내다보던 동료가 탄성을 질렀다.

너도나도 창가로 붙어 어두워진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다들 말없이 껌껌한 세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서서히 소리들이 형체를 드러냈다.     


건물 1층 마당에서 누군가 비질을 하는 듯했다. ‘쓱싹쓱싹’ 씩씩하고 부지런한 소리였다.  이어 ‘찰캉 찰캉’ 철로 된 정문이 요란하게 열리는 소리가 났고, 줄지어 나가는 서너 대의 자동차가 건물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광장을 오가는 수많은 차량의 불빛, 정류장에 멈추는 버스의 브레이크 소리, 교통정리하는 경찰관의 호루라기 소리.  


형광등과 컴퓨터 모니터에 묻혀 버렸던 작은 소리들이 하나둘씩 어둠을 뚫고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그렇게 손에서 놓지 못하는 휴대폰의 존재도 잊어버렸다.      


그동안 나의 삶 속에서 한쪽으로 밀려나 있던 존재들이 카메라 셔터 소리 한 방에 다시 묻혀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에게 주어진 10분을 조용히 마주했다.      


전기 절약을 통해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의 캠페인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 잊혀 온 수많은 소리를 떠올렸다.      


지난봄, 겨울잠에서 깨어 폴짝폴짝 뛰었을 개구리의 울음이라든지, 꽁꽁 닫은 한여름의 창밖에서 나무에 종일 붙어있는 매미와 새들의 울음소리라든지.  또, 인근 초등학교에서 들리는 쉬는 시간의 종소리나 1층 어린이집에서 선생님께 인사하고 손을 흔드는 아이들의 귀여운 인사 노래라든지.     


그러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환경에 제 자리를 빼앗겨 온 생명체의 소리 즉, 자연의 소리뿐 아니라 우리 인간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무수히 사라져 간 수많은 인간의 소리, 미약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작은 소리들을 얼마나 잊고, 또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     


과연, 내가 지금 당장 크게 숨을 쉬고 허파로 가득 밀어 넣고 싶은 소리는 어떤 것인가?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전차의 소리, 윗집 아이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도 모두 좋지만,

아무리 퍽퍽한 밥벌이 속에서도 이 소리만큼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  


여보세요. 응 우리 딸! 엄마야!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김기택 시인 [출처 : 한성대학교]



    

부쩍 풀벌레 소리가 커진 요즘 김기택 시인의 시를 읽다 내가 매달리고 있는 모든 전자기기가 무섭고 거추장스러워졌다. 그럼에도 이 글을 또 휴대폰에 꾹꾹 적어 옮기는 나는......  이 시답지 않은 글을 쓴다고 또 얼마나 많은 소리를 놓쳐버린 것인지.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소리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먼저 이 가을의 찌르찌르 풀벌레 소리,
사계절마다 속도와 세기가 다른 바람 소리,
지금은 사라진 그 옛날 새벽을 깨우던
 "메밀묵~ 찹쌀떡~"소리,
봄날 시끄럽게 울어대는 물 댄 논의 개구리 소리,
부르르 떨다가 파닷파닷 코스모스 위로
내려 앉는 잠자리의 날갯짓 소리,
우리나라와 달리 지상철이 많은 일본의 철길
'땡땡' 울리는 건널목의 신호등 소리,
한 밤중 들리는 '짤랑짤랑' 기름차 소리*,
한 여름 싱그러운 녹음 사이로
겨우내 쌓였던 얼음이 녹아 흘러내리는
애메랄드 빛 '계곡물소리',
그리고 영원할 것 같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자꾸만 붙잡고 싶은 '당신의 목소리'


* 이곳 일본에서 가정에서 사용하는 난방기구의 연료인 기름을 돌아다니며 파는 차가 있다. 기름차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맑고 경쾌한 '짤랑짤랑' 종소리는 자극적이지도 요란하지도 않지만,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 꿀벌의부지런한 날갯짓 소리도 좋아한다.




* 김기택 시인 사진 출처: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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