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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Sep 10. 2021

#9. 삽을 씻으며 퍼다 버린 슬픔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아빠는 종종 마당에 머무셨다.


일을 마치고 얼른 들어와 쉬시면 좋을 텐데 피곤한 몸으로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해 저무는 하늘을 올려다 보시기도 하고, 아빠를 가장 잘 따랐던 백구를 쓰다듬기도 하셨다.


“아빠아아아~! 식사하세요~오오!”

창문을 열고 고개를 쏙 내민 채 외치면 “그래~ 금방 들어간다.”라며 대답하시고는 몸을 ‘끄응’ 일으키셨다.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으셨던 아빠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이 되어도 아빠의 자전거는 한참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혼자서 집에 돌아오던 길,

나는 종종 홀로 앉아 있는 아빠를 보았다. 장소는 다름 아닌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푸조나무’ 아래. 나무 밑에 설치된 몇 개 되지 않은 낡은 벤치 하나에 걸터앉아 아빠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아빠아아아~”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한 번 불러도 대답이 없자, 배에 온 힘을 주고 다시 소리를 냈다.


“아빠아아아!”

물끄러미 하늘을 보고 있던 아빠가 고개를 돌리고 활짝 웃었다.


“오! 우리 딸! 이제 오니?”

“아빠아아아~ 여기서 뭐해요?”

등에 맨 책가방 어깨끈을 양손으로 꼭 부여잡고 있는 힘을 다해 아빠를 향해 달려갔다.


“하늘이 멋있어서 보고 있었어. 오늘도 학교에서 재밌게 보냈어?”

“응! 잘 보냈어요. 오늘 피아노 새 진도도 나갔어요.”

“잘했네. 기분 좋았겠네. 자, 집에 갈까?”


아빠는 자전거에 나를 태워주셨다. 기나긴 하루, 아빠의 셔츠에서 나는 땀냄새가 나는 싫지 않았다. 짧은 팔로 아빠의 허리를 꼭 껴안고 아빠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아이코! 아빠 땀 많이 흘렸어. 냄새 나!”

괜찮아요. 난 좋은데, 아빠 땀 냄새!


넓은 등에 기대어 아빠의 고단한 하루를 ‘킁킁’ 맡을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홀로 앉아 하늘을 보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은 왠지 쓸쓸했다. 쓸쓸해 보였던 뒷모습과 달리 자전거에 올라 집으로 향하는 아빠는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그 시절, 홀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들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아빠의 시간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아빠는 여덟 식구를 책임지는 가장의 무게를, 온몸이 닳도록 땀 흘려야 했던 고단한 하루의 피로와 허무를, 하늘을 보며 위로받고 있지 않았을까!


찬란하게 타오르는 붉은 노을도 시나브로 사라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아빠는 하루의 에너지를 소진한 자신을 토닥이며 또 한 번 ‘으샤샤’ 힘을 내지 않았을까.


한 밤에도 좀처럼 바람 한 점 없이 후덥지근한 늦은 여름밤, 아빠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읊는다.


어른이 된 지금에야 조금 알 것 같은 아빠의 시간!

내가 조금만 더 철이 들었더라면 “아빠아아아!”라고 소리치지 않았을 텐데.

그냥 아빠를 못 본 척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8)


▲ 정희성 시인  [출처 :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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