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칠환 <새해 첫 기적>
“키도 조그만 게 걸음이 왜 이렇게 빠르냐?”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걷는 이들은 종종 말한다. 이런 나를 보고 어른들은 아빠를 닮았다고 했다.
새벽 3시. 아빠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각이었다. 대가족의 가장이라는 무게를 진 아빠는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더 많이 걸어야 했다. 당신의 두 다리에 여덟 식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다 함께 길을 걸으면 나는 아빠의 걸음이 좋았다. 짧은 다리로 성큼성큼, 아빠 걸음에 맞춰 걸었다. 아빠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지. 아빠처럼 늘 앞서 있는 빠른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열 살도 안 된 아이는 서두를 필요가 없어도 빨리 걷는 데 익숙해졌다. 그 걸음은 스물 성인이 되어 더 빨라졌고, 이전에는 없던 조급함까지 더해졌다. ‘잘한다’라고 칭찬을 받을수록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커졌다.
아침 6시에 일어났더니 할머니께 칭찬을 받았다. 학교에 제일 먼저 도착해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빠른 사람이 될수록 하고 싶은 일들도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장래 희망에 관한 질문은 가장 거북한 대화 중 하나였다).
쉼 없이 걷고, 어떤 날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빠르게 걷던 아빠가 언제부턴가 자식들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몇 미터를 걷다 쉬기를 반복하는 날이 잦아지더니, 결국에는 녹슨 기계처럼 뼈마디에서 무서운 소리가 났다. 아빠의 두 무릎에 쇳덩이가 살을 찢고 들어와 망가진 관절을 대신하기까지 수개월이 지났다.
더 이상 자식들 앞에서 씩씩하게 걷던 아빠는 볼 수 없다. 어색한 걸음으로 마당을 걷고, 골목을 걷고, 서서히 동네 밖을 나서기까지 아빠의 걸음은 무겁고 신중했다.
덩달아 아빠 옆에서 내 보폭도 작아졌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걸어야 할 것 같은 늘 긴장 가득했던 두 다리를 천천히 옮겼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느린 대로 내 삶은 진행되고, 느린 대로 세상은 돌아갔다.
누구보다 빠르던 아빠는 이제 당신에게 꼭 맞는 속도를 찾았다. 비록 더디지만, 두 다리에 부담을 주지 않는 속도. 이전에는 즐길 수 없었던 동트기 전 신비한 푸름이 가득한 하늘도, 온갖 붉음이 뒤엉켜 입을 떡 벌이고야 마는 해지는 붉은 하늘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저마다 살아가는 공간과 방법, 그리고 속도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 아빠와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이라는 공평한 시간을 우리는 각자의 보폭으로 걸어간다.
조바심 내고 덜렁대는 철부지 어린 말에서, 느리지만 꾸준한 달팽이가 된 것 같은 나의 곁에서 아빠는 어느새 묵직한 바위가 되었는지 모른다.
각자의 속도와 보폭으로 걷는 새해,
그래 기적은 지금부터!
<새해 첫 기적>
반칠환 시인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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